바르트의 <사랑의 단상>, 프롬의 <사랑의 기술>, 드라마 <종이의 집>
1월이 간다. 1월은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오랫동안, 자주, 다각도로 생각하며 보낸 것 같다.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 독서모임이 출발점이 되었다. 모임은 끝났지만 사랑에 대한 생각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사랑의 단상>과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함께 읽었다.
뜬금없이 빠져서 본 넷플릭스 드라마 <Money Heist:(종이의 집)>의 사건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사랑이다. 그놈의 '사랑'때문에 계획과는 다른 일들을 벌이게 되고, 그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사랑이 사그라들기도 하고, 사랑의 대상이 변하기도 한다.
은행을 털기 위해 모인, 서로 개인적인 관계를 맺으면 안되는 사람들 중 리오와 도쿄가 가장 먼저 사랑에 빠진다. 조용하고 숫기 없는 리오와 산전수전 다 겪은 즉흥성 끝판왕인 도쿄, 서로의 다른 매력이 사랑의 시작을 가능하게 한게 아닐까 생각한다.
상사 알투르의 아이를 가진 인질 모니카는 자신의 사랑이 부정당하자 강도단의 일원인 덴버와 사랑에 빠진다. 덴버의 아버지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사랑을 의심한다. 인질들이 보이는 스톡홀름 증후군을 사랑으로 착각하는 거라는 일갈에 덴버는 둘의 사랑을 의심하고 끝내려 한다. 그러나 모니카는 사랑하는 상대가 자신의 사랑을 의심하는 와중에도 사랑하는 사람, 덴버를 위해 인질들의 탈주 계획을 방해하는 일을 하고, 결국 총을 들고 강도단에 합류한다.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이 모든 일을 계획하고 모든 경우의 수를 계산하고 대비한 교수가 협상가 라켈과 사랑에 빠진다는 것이다. 라켈은 사랑에 빠질 수 있는, 아니 빠질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있었다. 친권을 놓고 전남편과 다투는 중이었고, 예상 못한 은행강도 사건 발생으로 아이를 치매걸린 엄마에게 맡기고 집을 나와야 했다. 곤란한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슬며시 나타나는, 의심의 끈을 놓지 않으려 애를 쓰고 총을 겨누고, 체포하려 해도 끝끝내 웃고마는 교수, 아니 살바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거다.
삶이 힘겨울 때, 위로가 되는 한 사람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지, 게다가 그 사람도 나를 사랑한다니, 벽에 부딪힐때마다 살바에게 전화를 거는 라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에피소드가 하나하나 진행되면서 교수가 라켈을 정말 사랑하는 건지 아니면 일을 진행하기 위한 단순한 도구로 위장한 행동들이었는지 궁금해졌다.
살바가 은행강도단의 수장인 교수라는 사실을 알게 된 라켈은 그를 범행 모의 준비 장소였던 맨션에 묶어두고 차를 몰고 나가서 거짓말 탐지기를 들고온다. 내게 그녀의 행동은 범인을 잡는것보다 자신에게 쓰여진 누명을 벗는것보다 교수가 자신에게 보여줬던 행동들이 사랑인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녀의 이 선택은 스스로를 자신이 있던 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게 막는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이 궁금한 것, 그래서 그 사람도 나와 같은 마음인지, 눈빛, 몸짓, 언어로 표현된 모든 것이 내가 느끼는 것처럼 사랑인지 알고 싶어 하는 마음, 그래서 평소의 나라면 하지 않을 법한 일들을 저지르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는 것, 그게 바르트가 말하는 사랑이 아닐까.
에리히 프롬은 그런건 사랑이 아니라고, 미성숙한 상태의 감정의 요동일 뿐이라고, 신경증적인 상태를 사랑과 착각하는 거라고 말한다. 안정감을 느끼고, 상대에게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하는 말과 행동이 기본이 되는 삶의 태도가 사랑이라고, 그래서 사랑이 습득하기 위해 노력하고, 끊임없이 연마해야 하는 기술이라고 말한다.
프롬의 책을 읽고 있다고 하자 많은 분들이 20대에 이 책을 읽은 기억을 나눠주셨다. 생각해보니 내가 프롬의 <사랑의 기술>에 빠지게 된건 지금 내 삶에서 추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가치가 안정감이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이십대 초반에 만나 서른이 되기 전에 결혼을 했다. 프롬의 책을 이십대에 읽었다면 아마도 결혼을 하면 당연히 따라 올 거라 믿었던 안정감이라는 것이 끊임없는 노력의 산물이라는 말에 결혼 자체가 멀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당시엔 사랑 말고도 내가 노력해서 얻어야 할 것은 너무 많았다. 사랑까지 노력해서 가꿔가야 한다는건, 어쩌면 너무 가혹한 말이 아니었을끼?
결혼얘기가 오가고 식을 준비하던 와중에 나도 이른바 '메리지 블루'라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내가 결혼할 사람이 있다는 걸 몰랐던 옆 팀 선배가 은근한 호감을 표시해왔다. 모두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에 선배의 은근한 호감이 나의 착각인건 아닐까 하는 걱정도 했었다. 새내기 직장인으로서 지켜야 할 매너를 유지한 채로 어떻게 나의 상황을 알려야 하나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결국 '철벽'을 치고 난 후, 아, 이제 나는 사랑일까 아닐까 햇갈리는, 간질간질한 이 감정을 다시는 느끼지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조금 우울했던 것 같다. 남편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정말 내 사람인지 확신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강한 확신이 들어서, 그래서 무서웠던 것 같다.
<사랑의 단상>을 읽으며 내가 계속 바르트에 대해 삐딱한 시선을 유지했던 건, 내가 포기해야 했던 날것의 감정 같은 사랑이 진짜 사랑이라고 외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미 '성숙한 사랑'을 하고 있다고 믿는 나의 마음이, 어린아이의 순수함울 잃어버린, 때묻고 낡은 사람이 된거라고 말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그렇게 화가 났던게 아닐까?
바르트와 프롬, 둘 중 누가 진짜 사랑을 말했다라고 말하긴 어려운 것 같다. 다만 사람이 살아가는데 때에 맞는 읽을 거리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적절한 그 책을 골라낼 수 있는 눈이 생겼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해 보는데, 그런 능력은 결국 또 많이 읽어야만 길러지는게 아닐까. 뒤늦게 읽고 쓰기 시작한 사람이라 조바심이 나는 것도 사실이지만, 조바심은 잠시 내려놓고, 온전히 텍스트와 사랑에 빠지는 경험을 쌓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