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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bulddae Feb 19. 2024

내가 미래의 김영하를 키우고 있구나...해야지

난 줄곧 예술영화만 봤는데, 내 아들은 왜 마블 덕후가 된걸까.

이제 40개월이 된 아들은 언제부터였을까, 마블 덕후다. 아직 마블이랑 디씨코믹스를 구분하지 못해 어벤저스에 왜 배트맨과 슈퍼맨은 나오지 않냐고 물어본다. 나는 "음... 둘이 사는 집이 달라서 그래."라고 답했지만, 아이가 그 말을 알아들으려면 '소속사' 개념을 알아야 하니 앞으로 몇년은 더 필요하지 싶다.


언제부터였지. 아이가 스파이더맨에 빠진 건 30개월을 넘어서부터였을 거다. 남자 아이들 용품에는 워낙 슈퍼히어로 아이템이 많아서, 나도 이전까지는 그저 '귀엽다'고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24개월 쯤 아이 겨울부츠를 고르며 '하필' 스파이더맨이 달린 장화가 세일을 크게 하길래 옳다구나-하고 사주었는데, 처음에는 그냥 아무 소리 없이 신다가 슈퍼히어로- 특히 배트맨과 스파이더맨을 알고 난 후 어느날 갑자기 내게 소리쳤다. "엄마! 신발에 스파이더맨이 있어!!!" 그러더니 아이는 매일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이 신발을 신는다. 털달린 이 신발을 여름에도 신으려 해서 아주 곤혹스럽다.


첫 계기는 아무래도 유튜브였을 것이다. 우리집은 두 돌이 지난 후 스마트폰으로 아이 갓난아이적 사진과 영상을 종종 보여주었다. 아이는 자기 어릴적 영상을 아주 흥미롭게 봤는데, 이게 자연스럽게 유튜브로 옮아갔다. 처음엔 난처한 상황-장거리 이동하는 차 안에서 카시트에 앉지 않으려 하거나, 가족 외식을 위해 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당최 앉아있지 않으려 할 때-에서는 제발 잠시라도 좀 봐줬으면 해도 안 보던 유튜브를. 언제부터인가는 먼저 찾아서 보여달라 했다. 처음부터 스파이더맨을 보여준 건 아니다, 물론. 유아 애니메이션이나 창작 콘텐츠를 보여주었다. 그런데 그 가운데 형아들이 가면을 쓰고 코스프레한 영상이 적지 않았다. 사탕이나 쿠키를 슈퍼히어로 캐릭터를 차용해 만든 것도 많았다. 아이가 흥미를 느끼기에, 마블 캐릭터를 모아놓은 영어책을 사주었는데- 이게 화근이었다. 여기에서 아이는 본 적도 없는 모든 마블 캐릭터의 이름과 얼굴, 의상, 색깔을 외우고는 즐기기 시작했다. 신이 난 이모가 아이에게 해외직구로 피규어를 사주기 시작하면서 아이의 취미는 전성기를 맞이했다. 지금은 집에 슈퍼히어로 피규어가 한 20개는 넘나보다.

그러고나서부터 어린이집에서 찍어 보내는 사진에서 우리 아이는 매번 스파이더맨 포즈를 하고 있다. 아.... 이 일을 어쩐담- 싶은 생각이 들었을 땐 이미 늦은거였다. 아이의 이모는 이제 피규어에서 코스프레 의상으로 선물의 종류를 바꾸었다. 배트맨 옷을 선물받은 날, 나는 직감했다. 이제 아침 등원시간마다 배트맨 옷만 입겠다는 아이와 그걸 막으려는 나의 전쟁이 시작될 것이란 걸. 다행히 아이는 특별한 날에만 입자는 약속을 잘 지켜주고 있다. 종종 다른 아이들 엄마는 내게 "ㅇㅇ이는 너무 활발하고 명랑하고, 어쩜 이렇게 밝아요~"하고 칭찬해주지만, 나는 그 말들이 대부분 단체사진에서 유별나게 스파이더맨 포즈만 하는 우리 아이를 인상깊게 본 반응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래. 인생에서 좋아하는 거, 하고싶은 거 맘껏 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겠나. 유년시절에 그런 기억이 있어야지. 나이 들면 하고싶어도 못할텐데 지금이라도 지원해주자. 나는 당근에서 근육 쿠션까지 장착된 110사이즈 스파이더맨옷을 구해주었다.


유아들에게 취미란, 곧 생활을 뜻한다. 여가시간에만 하는 게 아니라 좋아하는 걸 늘 하려 한다. 요즘 내가 힘든 건 아이를 재우는 시간. 우리 아이는 태어났을 때부터 재우는 것, 먹이는 것에 애를 먹었다. 재울 땐 보통 한시간 이상을 다독여야 잠이 들었었는데 지금도 9시에 불끄고 수면모드를 조성해도 진짜 잠 드는 건 10시 반을 넘겨서 어쩔 땐 11시가 되어서다. 그럼 불 끈 방에서 1시간여를 무엇을 하느냐. 논다. 옛날이야기, 퀴즈맞추기, 슈퍼히어로 흉내내기 등. 가뜩이나 피곤한 나와 남편은 잠이 마구 쏟아지는데, 아이의 에너지가 마져 고갈될 때까지 그 걸 맞춰주어야 하루가 끝난다. 그리고 대부분 그건 나의 몫이다. 나는 요즘 아이가 평상시엔 정체를 숨기고 어린이집을 다니는 스파이더맨, 혹은 아이언맨이라는 설정의 '옛날이야기'를 두개 이상 해야 아이가 잠이 든다. 하나만 하고 끝내려면 난리가 나 결국 두개를 꼭 한다. 이모한테 캡틴 아메리카 내복을 선물받은 이후로는 계속 캡-아 역할을 한다. 나는 말도 안되는 설정에, 보도듣도 못한 괴물을 등장시켜 아이가 친구들 몰래 옷을 갈아입고 캡-아로 변신해 괴물을 물리치고 친구들 곁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를 끝도 없이 지어내고 있다. 감기에 걸려 목소리가 갈리지고 온몸이 쳐져도 아이는 봐주지 않는다. 어떤 순간엔 일종의 고문을 받고 있는건가 싶기도 하다.


그러다, 한번은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이 시간이 영원할 리 없다. 아이는 금방 자라고, 언젠가는 재워달라고 하긴커녕 인사라고 하려는 나를 빨리 나가라고 재촉할 만큼 클거다. 무엇보다, 유명한 소설가, 영화감독들은 어릴 때부터 이야기를 좋아하고 이야기를 스스로 지어내며 컸다고 하지 않나. 내가 지어내고 아이에게 들려주는 비현실적인 스파이더맨과 아이언맨의 이야기가, 아이의 상상력을 길러준다면 이것도 괜찮은 방법 아니겠어? 내가 미래의 김영하를 키우고 있는지도 몰라. 이야기를 지어내는 힘을 길러주자.


라고 다짐에 다짐을 했지만, 여전히 아이를 재우는 시간은 힘들기만 하다. 어제도 목소리가 갈라질 때까지 캡틴아메리카와 울버린, 배트맨, 아이언맨, 로켓, 로키 연합팀이 가습기 괴물과 샤워기 괴물, 토네이도 괴물, 물 괴물, 얼음 괴물, 깜깜 괴물을 물리치는 이야길 지어냈다. 아이는 얼마 전부터 승리를 거둔 후 어린이집에 돌아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쪽으로 스토리를 수정해달라 요청한다. 출동한 직후엔 잠시 돌아와 교실에서 사라진 ㅇㅇ이를 찾는 어린이집 선생님의 어깨에 손을 살포시 올리고, "ㅇㅇ이는 곧 돌아올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어른의 말투를 흉내낸 후 출동한다. 하아.....이렇게 아이는 계속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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