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제가 감독한 영화를 들고 타국 땅을 방문해 영화제나 개봉 전 시사회에 참석하는 건 과연 '문화 외교'일까 하고요.
평소 별로 떠올리지 않는 이런 생각을 한 이유는 얼마 전 '<일본의 미> 종합 프로젝트 간담회'라는 거창한 제목의 지식인회담이 개최되었다는 뉴스를 봤기 때문입니다. 총리는 그 자리에서 "국제사회에서 존재감을 높이기 위해 일본문화 예술의 매력을 전파하는 문화 외교를 적극적으로 펼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고 보도되었습니다.
2020년 개최 예정인 도쿄올림픽 유치를 위해 내건 슬로건 중 "지금, 일본에는 이 꿈의 힘이 필요하다"가 있었습니다. 이 슬로건을 읽었을 때 위화감이 들었던 이유는, 원래 올림픽은 스포츠라는 문화를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장일 텐데(적어도 명목상으로는요) 여기서는 '스포츠가 우리에게 무엇을 해줄 것인가'라는 너무도 노골적인 본심을 당당하게 주장하는 상스러움이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누가 쓴 권고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의 이 '문화 외교'발언에서도 저는 같은 위화감이랄지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이번 화제의 중심은 아무래도 전통문화라서 영화는 직접 언급하지 않는 것 같지만요.)
이 발언을 다시 읽고 가장 마음에 걸렸던 점은 목적으로 명시되어 있는 '존재감을 높이는'의 주어가 과연 무엇이냐는 것이었습니다. 문맥상 이는 명백히 '문화'가 아니라 '일본'입니다. 혹은 '국가'나 '나'겠지요.
스포츠와 마찬가지로 예술도 '문화'라면, 이들은 결코 '정치'의 종이 아닙니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문화를 이용하는 것을 외교라 부른다면, 그런 것과는 관계를 맺고 싶지 않습니다.(관계를 맺으라는 말도 안 하겠지만요.)
그보다 국익의 종이 된 문화를 참된 의미의 문화라 불러도 될지 저는 망설임을 느낍니다. 문화에 과학까지 포함해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텐데, 문화가 그때그때 정부에 눈엣가시가 되는 경우도 분명 있습니다. 적어도 그런 정부의 생각과는 무관한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 문화의 보편적 가치 아닌가요? 그 가치에 국익을 앞세우려는 건 문화를 왜소하게 만드는 일이나 다름없습니다.
(중략)
저는 제가 감독한 영화를 들고 파리에 왔습니다.
영화는 순수한 예술이 아니라 상품이기도 해서 경우에 따라서는 저 스스로가 세일즈맨으로 행동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콘텐츠'라고는 부르지 않지만 비즈니스이기는 하죠.
이 도시에서 영화를 개봉해 관객이 많이 와주면 그건 물론 저의 수입(이익)으로 이어지고, 이윽고 조금이라도 '국익'으로 이어지겠지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결과이지 목적은 아닙니다.
그리고 영화를 또 하나의 측면인 '문화'라고 볼 경우,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하는 건 '영화가 나에게 무엇을 가져다줄 것인가'가 아니라 '내가 영화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입니다. 요컨대 '국익'이나 저의 이익보다 '영화의 이익'을 우선하는 가치관이죠. 이야말로 영화를 문화로 여기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외교'라는 말의 주어가 '국가'이고 그 가치관을 '국익'과 떼어놓을 수 없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문화'와는 양립할 수 없습니다. '문화 외교'라는 말에서 느낀 위화감은 그로 인한 것일 테지요.
저는 허울 좋은 말을 하는 것도 명분을 내세우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생각은 이처럼 세계를 돌아다니며 만난, 같은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는 '영화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배운 것입니다.
영화의 풍요로움과 자유는 영화를 존경하는 사람들의 그런 노력으로 유지되어왔으며, 저 또한 그중 한 사람이기를 바랍니다.
눈앞의 국익을 최우선으로 여기지 않는 것만으로도 '반일'이라는 꼬리표를 붙이는 이 나라에서 '문화'를 그렇게 바라보는 일이 과연 가능할지요.
(2015년 10월 20일)
평소 이 감독의 영화를 좋아해 신작이 나오면 꼭 영화관을 찾아 보려고 노력한다. 보고나면 늘 '생각을 얼마나 깊이까지 하기에, 이런 이야기를 만들고 영화로 찍어낼 수 있을까'하는, 존경을 넘어선 의아함이 들었다. 하루 세끼 밥을 해먹고, 씻고 자고 일어나 출근하고, 또 밥을 욱여넣고 설겆이하면 넉다운되는 내 삶에서 고민, 깊이, 성찰, 인사이트 같은 건 사라진지 오래지만. 나도 예전에 글을 열심히 쓸 땐 하나의 주제를 붙잡고 생각하고 쓰며 조금은 더 깊어지기도 했던 건 같은데.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좋아하는 영화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다. 아. 그리고 (요즘이 아닌) 옛날의 픽사.
부산엑스포 유치에 BTS를 부르자는 등, 월드스타를 기용해 뭘 하자는 식의 정부 발표에는 늘 거부감이 들었다. 그 이유는 정확히 모른채 그저 '손 안대고 코풀려 한다', '어디다 숟가락을 얹어?' 정도의 비판이 다였지만, 이 사람의 이 글은 내가 모호하게 느꼈던 그 거부감의 진원지를 정확하게 짚고 있었다. 나는 영화나 음악, 미술을 포함한 예술이 예술 자체로'만' 존재해야 한다는 데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사람을 배제하지 않고, 사람의 인생과 생활에서 우러나와야 한다는 고지식한 선입관이 있다. 그렇다고 그 예술이 다른 목적을 위해 동원되거나, 이용되는 건 결코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디, 예술 뿐인가. 애초에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진 공산품이 아니고서야, 어느 무엇이든 다른 이데올로기를 위해 활용되는 것은 악용되는 것이다. 예술이 기성품이나 공산품이 아닌, 예술가의 정신과 의지, 가치관이 들어있다면 그 예술가의 존엄성을 생각해서라도 남이 함부로 불순하게 갖다 써선 안된다. 정치를 떠나 그건 무례한 거다.
보통의 사람들이 정치를 싫어하고 혐오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무엇이든 자기합리화를 위해, 누구든 내 편을 만들고자 어떤 명제든, 누구든, 어떤 사건이든, 심지어 대형참사까지도 이용해버리는 그 블랙홀같은 위력에 사람들은 환멸을 느끼는 것 아닐까. 고레에다 히로카즈처럼 그 이유를 이렇게 적확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사람들조차 말이다.
오랜만에 에세이집을 읽으며, 이 사람의 생각을 통해 나 역시 많은 생각을 한다. 예전의 나는 그 생각을 그때그때 메모해 한편씩 제대로 된 글로 써놓았지만, 지금의 나는 뭐라도 하나 생각나면 그 즉시 잊어버리고 만다. 그래도 오늘은 이렇게 상사 눈을 피해 회사 컴퓨터로 하나 쓰는구나. 운수 좋은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