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가야지'
'나중에 가봐야지'
찜해두는 나라만 늘어나는 게 언제부턴가 의미 없게 느껴졌다. 말은 죽기 전에 가겠다고 하지만, 가는데 순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뉴스만 봐도 생과 사 사이의 경계의 두께는 A4용지 한 장의 두께보다 얇게 느껴지는데 무슨 능력으로 미뤄둔 곳들을 죽기 전에 갈 수 있을 거라 장담한단 말인가.
그 마음으로 반년 간의 세계여행을 준비했다. 이제 그만 미루고 갈 수 있을 때 가자.
그렇게 고른 15개국 안에는 태어나서 처음 가 보는 중동 국가도 있었다. TV 속에만 있는 세상 같았던 흙빛의 나라, 요르단을 혼자 다녀왔다.
여행자들 사이에서 요르단은 '중동의 영국'이라 불리기도 한다. 중동 국가 중 (그나마) 여행자에게 유독 신사적인 나라라는 의미다.
그 의미를 알고 있어도 마음을 완전히 놓지는 못했다. 여자 혼자이기도 하고 매스컴에서 본 일련의 사건들은 극히 일부라는 걸 알고 있어도 '혹시나'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도에서 요르단 위치를 찾아보면.... 모르는 게 약일 때도 있다.
게다가 터키에서 요르단을 오는 길, 공항에서 노트북까지 분실했다. 세계여행을 하면서 나름 믿을 구석 중 하나였는데 사라진 채로 요르단 수도인 암만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이제 진짜 믿을 구석은 어딘가 나사 하나 느슨해진 것 같은 머리와 휴대폰뿐이었다.
'차근차근. 하나씩 해 나가자.'
속으로 계속 주문을 외우면서 환전을 하고 유심을 사고 시내 가는 벤을 탔다. 그렇게 나중에 가본다던 그 '나중'이 시작됐다.
국토의 70% 이상이 황무지라는 요르단은 남는 게 땅이었다. 새벽 버스를 타고 도시 이동을 하면서 본 창밖 풍경은 아무것도 없는 흙 그 자체였다. 건물이 빼곡하게 지어진 곳은 수도인 암만 밖에 없었다.
그래서 암만에서의 시간이 더 특별했다. 요르단에서 유일하게 다채로운 도시였다. 클락션을 누르지 않으면 큰일 나는 건지 모든 차량이 빵빵대는 정신없는 도로. 옷가게마다 걸려 있는 다양한 디자인의 히잡들. 꼬불꼬불 뜻이 예상조차 되지 않는 아랍어. 시장 거리를 채우고 있는 낯선 식재료들. 손안에 쥐어진 금액을 알 수 없는 동전들. 이탈리아 로마를 생각나게 하는 암만 성채 속 조각난 흔적들처럼 각기 다른 형태를 가진 매력이 도심 곳곳에 있었다.
*암만 사람들은 '중동의 영국'이라는 수식어를 철석같이 믿게 했다. 암만 국제공항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시내를 가려면 7써클(7-circle)이라는 도로 한복판에 내려서 택시로 갈아타야 한다. 그걸 모든 택시 기사들이 알기 때문에 벤에서 내리자마자 많은 기사들이 다가온다. 괜찮다고 해도 떠나지 않는 기사들 사이에서 단호하게 선을 그어준 건 현지 학생들이었다. 교복 입은 남자애들이 와서 아랍어로 뭐라뭐라 기사님한테 이 금액 이상은 절대 안 된다고 말해줬다. 그러면서 나에게 "우버로 택시를 불러요. 시내까지 이 금액이면 갈 수 있어요."라며 도움을 줬다.
시내 환전소 아저씨들도 모두 친절한 말투도 환전을 해줬다. 마트 아저씨께 "동전을 잘 몰라서 어떻게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라며 갖고 있는 동전을 손바닥 위에 올려 보여줬더니 아저씨는 동전을 하나씩 집으면서 "이건 얼마고 이건 얼마짜리야" 하나하나 가르쳐주셨다.
로마 성채에서는 유명인이 되면 이런 게 일상이 되는 건가 싶은 시선들과 함께 했다. 다들 내 이름과 국적을 궁금해했다. 그리고 예쁘다고 스타일리시하다고 태어나서 들어본 적이 없는 칭찬들을 건넸다. 뜨악. 내향인이라 처음에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는 당황스러움에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연예인병은 이렇게 걸리기 시작하는 건가 보다. 여행 중반에는 "고마워! 너 이름은 뭐야?" 자연스럽게 받아치는 능력이 생겼다. 무대 공포증이 올 것 같았던 수십 명의 시선이 재미있다고 느껴질 때쯤 요르단에 완벽히 적응했음을 인정했다.
여행자들이 요르단을 찾는 이유의 7할은 페트라에 있을지도 모른다. 페트라 덕분에 요르단을 알게 된 사람들도 많다. 누가 정하는 건지 모르겠는 게 여덟 번째 불가사의인 <세계 7대 불가사의> 안에 들어가는 페트라는 바위를 깎아 만든 암벽 도시다. 애니메이션 <알라딘> 속 배경지인 아그라바의 모티브이자, 영화 <인디아나 존스> 촬영지로 알려져 있다. 신비로움으로 똘똘 뭉쳐진 페트라에서 가장 유명한 건 가장 정교하게 보존된 알카즈네 신전이다. 어떻게 조각했을지 감도 오지 않는 어마어마한 흙빛 신전은 자연의 일부이자 인간의 믿음이 어디까지 해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섬세하게 문양을 내고 입체감을 살린 걸작 앞에 서서 올려다보면 사람이 못 이뤄낼 건 없다는 믿음 또한 덩달아 생긴다. 그렇게 자신감도 키가 큰다. 세계여행의 끝 그리고 그 이후까지 마음먹은 건 다 현실로 만들 수 있다. 나는 해낸다. 결국에는 이뤄낸다. 팔백여 개의 계단을 올라야 도착하는 페트라 정상 수도원을 그 마음으로 다녀왔다. 물론 그 과정에서 체력은 잃은 것 같지만.
미지의 도시에서 믿음을 배웠다.
장기간 여행이 지속됨에 따라 소진된 체력이 회복되는 시간도 길어졌다. 완충되지 않는 체력으로 요르단의 마지막 도시인 와디럼 보호구역에 도착했다. 와디럼은 우리가 '사막'하면 생각하는 끝없는 황무지다. 영화 <듄> <마션> 촬영 지였던 만큼 스크린에서 봤던 그 풍경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 속에서 잠을 잘 수 있다면?
와디럼 보호구역은 무조건 가이드가 동행해야 들어갈 수 있다. 나 또한 사전에 가이드 투어를 예약했고 그건 무려 사막에서의 1박 2일 지프투어였다. 지프카(jeep)를 타고 가이드를 따라 와디럼의 주요 스팟들을 여행하고 사막 위에서 돗자리 펴고 현지식도 먹고 베이스캠프에서 잠도 자는 이색의 끝에 있는 프로그램이다.
버섯 모양을 닮은 머쉬룸 락(Rock). 바위에 새겨져 있었던 고대 문자. 호주의 울룰루를 생각나게 하는 거대한 바위산. 코끼리 바위 등 황량한 사막 안에서도 볼 게 참 많았다.
투어 내내 오르락내리락하니 나중에는 피로함에 체력이 발라당 백기를 들었다. 나중에는 밑에서 구경만 하겠다고 했지만, 아무리 발을 앞으로 내딛어도 제자리걸음이었던 사막 언덕과 바람 때문에 모래를 먹는 건지 음식을 먹는 건지 헷갈렸던 돗자리 피크닉,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사막의 저녁, 촘촘하게 별이 떠 있는 밤하늘, 그 속에서 먹은 닭구이 저녁식사는 절대 잊지 못할 추억들이다. 사실 지금도 어안이 벙벙할 때가 있다. 진짜 내가 이것들을 경험했다고?
요르단은 중동 음식에 푹 빠졌던 시간이기도 했다. 본래 팔레스타인의 디저트인데 이슬람교를 가진 국가에서 라마단 기간에 먹는 음식이 됐다는 '끄나페'는 세계여행 중 먹은 모든 디저트 중 단연 일등이었다. 치즈 페이스트리 전체가 덮이도록 꿀을 붓고 그 위에 피스타치오 가루를 뿌리는 끄나페의 눅진하고 달달한 치즈맛은 말이 안 됐다. 숟가락으로 페이스트리를 찢어 떠먹는 내내 행복했다. 지나치게 달지 않고 살짝 녹은 치즈 특유의 고소한 맛이 진한 끄나페는 그렇게 인생 디저트가 됐다.
할랄가이즈 덕분에 처음 접했던 콩 완자, 팔라펠도 실컷 먹었다. 본 고장에서 먹는 팔라펠이라니. 초록색 반죽으로 탁구공 크기의 동그란 모양을 잡고 기름에 튀기는 장면을 볼 때마다 설렜다. 팔라펠은 중동 국가의 국민 음식으로 꼽히는 만큼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덕분에 요르단 여행 내내 팔라펠은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암만에서는 미리 지도 앱에 저장해 두었던 팔라펠 샌드위치 가게를 찾아갔다.
페트라에서는 식당에서 팔라펠밀(falafel meal. 팔라펠 정식쯤으로 생각하면 흡사하다)을 먹고 '여기 맛집이잖아!' 감탄해서 팔라펠만 포장해서 다음 날 점심으로 먹었다.
페트라에서 와디럼 가는 셔틀버스 안에서는 기사님이 어느 가게에 들르시더니 따끈따끈한 팔라펠 두 개를 나눠주셨다. 갓 만들어져 부드럽게 입 안에서 부서지던 팔라펠은 요르단에서 먹은 것 중 가장 맛있는 팔라펠이었다.
팔라펠과 같이 중동 음식은 콩으로 만들어진 것들이 많다. 평소에 콩을 좋아하는 여행자에게 요르단이 얼마나 맛집이었겠는가. 반드시 한국에서 진짜 중동 음식을 파는 가게들을 찾아보겠노라 몇 번이고 다짐했다.
모니터에서 볼 때마다 미지의 나라라고 생각했던 요르단 땅을 일주일 동안 밟았지만, 지금도 요르단은 어떤 곳이라고 선명한 대답은 못 한다. 다양한 면모가 있고, 고작 일주일 여행한 것만으로 그 깊이를 다 헤아린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마치 아직 탐구해야 할 곳이 많은 우주의 어느 행성처럼. 황무지가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지만, 그 속에 더 많은 비밀과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을 것 같다.
황량한 사막과 고대 유적, 그리고 활기찬 도시의 매력을 동시에 지닌 나라를 인생 첫 중동 여행지로 선택한 건 큰 행운이었다. 알지 못했던 대륙에 서툴게 발을 내딛으며 배운 마음들은 앞으로의 삶에 큰 지지대가 될 거다. 요르단에 대해 단 하나 확실하게 설명할 수 있는 건 중동에 제대로 '입덕'하게 해주는 곳이라는 거다.
*그래도 조심 또 조심하자. 좋은 사람이 다수였지만 뒷 생각이 다른 현지인들도 더러 있다. 결혼했다고 거짓말을 해도 저녁 약속을 제안하는 남자. 암만에서 몇 시간이 걸리는 다른 도시들을 여행시켜 주겠다는 남자. 카메라를 신기해하며 자기도 찍어보면 안 되냐고 손을 내밀며 구걸하는 아이들 등.
▼ 뚜벅이 여행자 윤슬의 세계여행 사진들로 제작한 휴대폰 배경화면은 아래 링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