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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속의우주 Nov 13. 2024

비타민 충전을 위하여! 애월미깡창고

[제주] 혼자옵서. 미깡 있수다. 왕 방 갑서!

제주도는 섬 전체가 관광자원을 품고 있다. 그래서 제주도 여행을 계획할 때면 누구와 어디를 가느냐에 따라 여행 목적지가 확연히 달라진다. 운전을 못하는 20대 청년들이 교통수단에 의존해서 친구들과 여행을 한다면, 지근거리에서도 놀거리와 먹거리가 많은 서쪽 해변으로 향한다. 시끌벅적한 관광지 말고 높은 파도와 강한 바람을 맞으며 자연 풍경을 즐기고 싶은 30~40십대 연인과 가족들은 동쪽 해안가로 향한다. 눈이 오든, 비가 오든, 그런 건 상관없이 오로지 산길을 즐기고 싶은 모험가 또는 50대 이상 어른들은 제주도 내륙의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한라산으로 간다.

  

여행기간이 아주 길지 않은 한, 서쪽과 동쪽, 내륙을 모두 아우르는 여행을 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한 번의 제주도 여행으로 모든 곳에 가보겠다고 욕심을 내다가는 매번 숙소 위치를 옮겨야 하고, 이동 또는 운전으로 체력을 낭비하며 피로해지기 십상이다. 그렇지만 제주도의 어느 동선으로 가든지 모든 여행자의 첫 출발지는 제주국제공항이다. 공항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위치한 '애월미깡창고'는 내가 어디로 향하기로 했든지 간에, 제주도를 방문한 날 첫 번째로 들러 볼 수 있는 곳이다. 이 카페에는 감귤 과수원이 있어서 늦가을인 10월부터 '감귤 따기' 체험을 해볼 수 있다. 제주도를 돌아다니며 언제 어디서든 호주머니에서 귤을 꺼내 까먹는 여행자가 되는 일은 낭만적이다.


제주공항 주변은 유명한 관광지가 없는 시가지 모습에 더 가깝다. 그래서 여행자들이 줄곧 지나치는 곳이기도 하다. 제주도에서 종사하는 근로자들이나 토박이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고, 동네 장사를 주로 하는 음식점들 뿐이겠구나 나도 그렇게만 생각했었다. 그래서 공항 주변에 귤밭 체험이 가능한 카페가 있다는 게 처음에는 믿기지가 않았다. 카페 이름에서 눈치챌 수 있듯이, 제주방언으로 '귤'을 '미깡'이라고 부른다. 서울 시내 한가운데 과수원이 있다는 게 가능한가? 나는 단연코 그런 상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미깡창고'가 도대체 어떻게 생긴 곳인지 더욱 궁금해졌다. 다음 행선지가 어디든지 내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곳은 가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지도에서 '미깡창고'를 검색해서 처음 운전해 찾아간 날의 일이다. 그 동네 일대는 차량으로 출입할 수 없는 좁은 골목으로 굽이쳐 있었다. 카페 주변에 도착했지만 그곳에 완전히 도착하기 전에 차량 내비게이션이 뚝하니 안내를 종료해 버렸다. 주변 갓길에 주차하고, 차에 내려서 두 바퀴쯤 그 마을을 돌았던 것 같다. 빙글빙글 돌아 같은 자리로 돌아와서야 내가 무심코 카페를 지나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지막한 지붕의 주택들과 온갖 창고들로 가득한 이 골목에서... 나는 마녀의 흑마술에 걸려 버린 듯했다. 서둘러 가려다 보니 더 오래 그곳을 찾을 수 없었다. 천천히 둘러보고 한 뼘 더 가까이 들여다보았더라면 이곳을 지나치지 않았을까?


길을 돌고 돌아 골목에서 발견한 '애월미깡창고'의 첫 광경


회색 돌담을 따라 다시 길을 되돌아갔다. 별생각 없이 지나쳤던 골목길에 놓인 집이 바로 '미깡창고'였다. 조금은 허탈하기도 했다. 대형 식료품 창고처럼 회색빛의 대형 컨테이너를 상상했었는데, 그곳은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였다. 언뜻 보면 시골의 어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고 계신 평범한 주택 같았다. 붉은 벽돌색의 지붕에 흰색으로 페인트칠이 되어있는 나지막한 집. 그 옆에는 김치인지, 된장인지 모를 게 담겨 있는 듯한 장독대와 늙은 호박들이 피라미드 모양으로 쌓여 있었다.


집의 왼편에는 짚으로 만든 길이 언덕 아래까지 이어졌는데, 마치 집의 앞마당으로 들어가는 모양새였다. 그쪽으로 들어가려니 내가 마치 남의 집을 염탐해 가며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며 길고양이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그 길의 반대편인 집의 오른편으로 향했다. 언덕 밑으로는 숨겨진 건물의 아래층과 유리문이 보였다. 언덕을 따라 내려가보니 이 층집 높이는 되는 높은 집의 벽체가 누런 보리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맨 처음에 보았던 그곳과 같은 집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벽의 왼쪽 끝, 한 귀퉁이에 'Mikkang Storage'라고 검정 글씨가 적혀 있었다. 무심한 듯 시크하게 적힌 휘날린 그 이름을 발음기호대로 읽어보니 '미깡스토리지'였다. 한글로 큼지막하게 간판을 걸어두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 일반 관광객들에게 "여기에 카페가 있어요"라고 크게 홍보할 목적이 없어 보였다. 주인장이 감귤나무를 소중하게 다뤄줄 수 있는 사람들만 초대한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이 공간이 나에게 더 특별할 곳이 될 것만 같았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니 이 카페 집체가 제주도 천연자원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자랑하듯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정형화된 네모난 콘크리트 돌이 아니라 뾰족뾰족한 자연의 돌을 깎아내거나 어렵게 쌓아 올려 벽을 쌓은 듯한 인테리어가 눈에 띄었다. 그럼에도 돌의 차가운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시골집 마구간에 아기 당나귀 돈키가 주인아저씨와 함께 생활하고 있을 것만 같은 정겨운 느낌이었다. 햇살을 향해 뚫려 있는 통유리창 주변에는 하얀색 보리수가 장식되어 있어, 카페 바닥에 보리수가 드리우는 그림자는 마치 바닥 타일처럼 무늬를 내었다. 밝은 캐러멜색의 나무 테이블과 의자, 아이보리 색감의 패브릭 쿠션들이 곳곳에 놓여 있었고, 그래서인지 전체적으로 이 집으로부터 포근한 인상을 받았다.


유리창을 열고 밖으로 나갈 수 있었는데, 감귤밭으로 향하는 길이 눈에 띄었다. 기다란 돌다리처럼 일렬로 쭉 뻗은 길과 그 길을 따라 서 있는 야자수의 풍경은 압도적이었다. 내가 들어가면 안 될 것만 같이 느껴졌던 이웃집의 마당이 바로 그곳이었다. 밀짚으로 만들어낸 파라솔은 마치 동남아시아에 놀러 온 듯한 들뜬 기분을 선사했다. 파라솔이 없는 자리에서도 캠핑을 온 듯한 감성이 가득했다. 감귤을 담을 수 있는 나무 상자를 거꾸로 뒤집어 테이블로 쓰게 했는데 캠핑 의자가 그 테이블과 높이를 맞추며 구색을 갖추었다. 그보다 따뜻한 기후의 섬을 여행할 때만 볼 수 있는 뾰족뾰족한 초록색 야자수의 잎들은 하늘을 더 푸르게, 바람을 더 상쾌하게 느껴지게 했다.


커피를 주문하고 야외에 자리를 잡고 앉은 나는 그제야 제주도의 햇살을 너무 얕보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주도는 햇살이 뜨겁고 바람이 많이 불어 과일이 자라기 좋은 기후 환경을 가진 것이 아닌가! 익어가는 과일들은 좋겠지만, 눈가와 이마에 주름이 자글자글해질 때까지 눈이 찡그려진 나는 차라리 산책을 하는 게 낫겠노라 생각했다. 다행히도 나는 커피를 시켜 놓고 앉아 있기만 하는 걸 무척 싫어하는 유형의 여행객이었다. 제주도까지 놀러 와서 카페의 한 풍경만 바라보고 있다가 돌아가기에는 어딘가 모르게 아쉽지 않은가?


아까 주문할 때 보니 메뉴판 한편에는 감귤밭 입장료와 체험권이 소개되어 있었다. 단돈 만 원으로 감귤 밭을 돌아다니면서 사진도 찍고, 맛깔나게 익은 감귤을 한 바구니 따서 가져갈 수 있다니! 주인장은 꽤나 크기가 큰 은색 버스킷통을 나눠주는데, 귤을 서른 알 정도는 포개어 담을 수 있을 정도였다. 짧은 여행 기간이더라도 숙소에서, 차에서, 다른 관광지 등에서 언제 어디서든 귤을 까먹으면서 돌아다닐 생각을 하니 신이 났다. 여행 막바지에 이곳에 들렀다면, 귤을 캐리어에 담아 가기 어려워 포기했을 텐데, 첫날 이곳에 방문하기로 계획한 나의 영리함을 스스로 추켜 세웠다.


미깡창고 감귤체험 안내판(좌), 향긋한 감귤밭에서 과일 사냥을 하는 내 모습(우)


하늘도 나를 도왔다. "비 오는 날은 체험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우비까지 챙겨 오는 여행객은 적으니 우산을 쓰고 과수원을 돌아다니다가 귤이 상처를 입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감귤 바구니를 받아 들고 감귤 밭으로 들어서자, 과수원의 초입에 있는 첫째 줄부터 셋째 줄까지의 감귤 나무들이 어쩐지 휑했다.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온 가족들이 많이들 다녀간 흔적이기도 했다.  '귤을 이미 많이 따 가지고 갔는데? 내가 따갈 게 남아 있기는 하겠지?'. 순간적으로 마음이 조급해졌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내가 예측했던 것보다도 '미깡창고' 뒤에 숨겨진 과수원은 10배 이상으로 큰 규모였다.


그렇다면 인적이 드문 곳에는 더 좋은 감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과수원의 끝 줄까지 들어가 보았다. 그곳에 이르니 야외에서 커피를 마시며 떠들고 있는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고요한 밭에 서 있으니 내가 한가로운 선비 아니면 여유로운 농부가 된 것만 같았다. 달콤하고 향긋한 귤의 향기, 흙을 밝고 지나가는 나만의 발소리, 등 뒤로 따사로운 햇살... 이것만으로도 유유자적하는 삶이 얼마나 행복할지를 가늠해 볼 수 있었다. 


감귤을 먹으며 비타민을 충전하는 제주도 힐링 여행. 제주도의 또 다른 매력을 알게 해 준 '미깡창고'. 창고 주인과 대화를 나눠보지는 못했지만, 제주도 분이셨더라면 내게 이렇게 인사를 건네지 않았을까?


"혼자옵서. 미깡 있수다. 왕 방 갑서!"

(어서 와요. 감귤 있어요. 와서 둘러보고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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