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오오오력에 대하여
참 먹고살기 힘든 시기다. 굳이 통계 같은 걸 뒤져보지 않아도 취업문이 좁아지고 있다는 것은 충분히 체감할 수 있다. 지난 9월 정부에서는 청년실업률이 9.4%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수많은 비정규직과 아르바이트생들을 꾸역꾸역 욱여넣은 수치임을 알고 있다. 더 절망적인 것은 그 9.4%의 수치마저도 날이 갈수록 야금야금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밤새 쓴 이력서가 그 회사의 세절기를 통과해 어느 매립지에서 가루가 되어 뒹굴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참담하기만 하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생각한다. 내가 더 노력해야 한다고. 아직은 부족하다고.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가?
우리는 노력을 강요받는 사회에 살고 있다. 바야흐로 노력 과잉 시대에 진입했다고 본다. 인터넷 서브컬처 안에서는 그걸 ‘노오오오력’이라 조롱하듯 부르기도 한다. 물론 노력은 나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바람직하다. 맞는 말이다. 노력하는 삶은 남다른 성과를 안겨주고, 스스로를 성장시키는 자양분이 된다. 그러나 노력만으로 성과를 거머쥐기에 현재 대한민국은 너무 가혹하다. 우리 청춘들은 지나치게 노력하고 있다. 끊임없이 노력이라는 이름의 채찍을 휘두르며 전진하려 한다. 하지만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는 것이 녹록지는 않다. 현실이라는 길은 노력만으로 전진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시대 청춘들의 현실 안에는 단순히 열심히 살아서는 넘어서기 힘든 벽들이 너무 많다. 스스로 생활을 꾸려나가는 취업준비생들은 생존이라는 파도를 일단 버텨내야 한다. 파도를 막아내며 유수의 기업들이 원하는(그들은 굳이 필요 없다고 말하지만) 경험치를 쌓고 아이템을 장착해야 한다. 그것도 내 돈을 들여서. 그런 생활들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노력만으로 밀어붙이기에는 현실은 가시밭길이고 희망은 너무나 작아 보인다.
소위 어른 또는 기득권이라 일컫는 ‘어떤’ 사회 지도층들은 노력이라는 이름으로 청춘들을 독려하려 한다. 힘내라고, 많은 어른들이 당신들을 응원하고 있다고, 열심히 정진하면 언젠가는 적절한 보상을 얻을 것이라 말한다. 그런 식으로 가엾은 청춘들을 어여삐 여기며, 그들이 끊임없이 현실에 도전하도록 설득한다. 한데 내가 보기엔, 그들이 진실로 청춘의 고통에 관심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저 본인들이 청춘의 삶을 이해하는 척, 아울러 젊은 감각을 겸비했다고 어필하며 본인들의 이미지를 개선시키려 하는 것이다.
그네들이 청춘에게 그토록 힘쓰기를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부분의 청춘들이 수많은 시도에서 고배를 마시며, 아등바등 실낱같은 희망에 매달리고 있다. 그러나 지금과는 달리 그들이 가장 빛났던, 그러니까 성실과 근면이라는 두 가지 무기를 손에 쥐고 활약하던 그 시대는 이미 끝났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경험이 언제든 진리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현재 청년들의 삶을 세세히 들여다볼 생각도 없고, 그렇게 해 본 적도 없다. 그들이 그런 신념을 갖는 것도 이해는 간다. 원래 어떤 사람이든 가장 고됐고 또 열의에 넘쳤던 순간을 기억하길 좋아하기 마련이다. 하나 이미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구세대의 판타지가 되어버렸고, 이제는 개천에서 태어나 용의 꼬리라도 붙잡으려 안간힘을 쓰는 세상이다. 근면, 성실, 노력이라는 삼박자만으로는 혹독한 사회의 리듬에 올라탈 수 없다.
게다가 노력의 여부를 묻는 것은 결국 모든 실패의 결과를 개인에게 전가시키고 만다. 사실 노력의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매우 모호한 일이다. 노력이 부족했다는 것을 어떻게 판단하며 또 누가 판단하는가? 취업 지원에서 번번이 탈락하면 노력하지 않은 것인가? 이미 수많은 젊은이들은 기를 쓰고 취업 시장에 몸 던지고 있다. 더불어 자신의 노력에 대해 합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는 젊은이들도 수두룩하다. 그러나 청춘들은 이 현실을 버텨내기 위해 별도리 없이 실패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는다. 이번엔 노력이 부족했으니, 더 부지런히 움직이면 언젠가는 성공할 수 있다는 일말의 희망이라도 한 줌 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은 이미 충분히 힘쓰고 있다. 이들에게 노력의 보람을 안겨줄 수 있는 사람들은 이 사회를 이끌고 있는 어른들이다. 어른들은 자신들이 만든 이 엄혹한 사회에서 발버둥 치고 있는 청년들의 삶을 더 이해해야 한다. 이들이 노력하다 지치고 지쳐 결국 어른들 품에 쓰러지지 않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