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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곤 Nov 29. 2017

무라카미의 보스턴과 나의 보스턴

무라카미 하루키,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

   내가 아는 사람 중(서로 아는 건 아니지만) 여행에 자신의 취향이 가장 잘 묻어나는 사람은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다. 그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인 동시에 소문난 재즈광이자 마라토너이다. 소설가가 되기 이전에는 재즈바를 운영했고, 보스턴 마라톤 수 차례를 비롯해 정기적으로 풀코스 마라톤을 완주하고 있다. 그의 여행기에는 재즈와 달리기를 사랑하는 그의 취향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길을 지나다 발견한 올드 레코드샵에서 재즈 음반을 뒤적이는 건 필수고, 낯선 도시에서도 좋은 러닝 코스를 발견하면 새벽같이 숙소를 나서 그곳을 달린다.


재즈바 운영 당시의 무라카미 ⓒPeter Cat(1978)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ラオスにいったい何があるというんですか?>는 취향이 묻어나는 여행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1995년부터 2015년까지 잡지에 기고된 무라카미의 여행 에세이 10편을 모았다. <무라카미 라디오> 시리즈나 <잡문집>처럼 다양한 소재를 다루지 않는 대신, 여행이라는 소재만으로도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음을 제대로 보여준다. 그럴 수 있었던 까닭은 그의 여행이 단순히 보고, 먹고, 사진 찍는 것에 그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뉴욕에서는 평소 존경해 마지않던 재즈 뮤지션의 숨결이 남아있는 재즈 클럽을 순례하고, 구마모토에서는 아침부터 산책로를 달린다. 무라카미에게 여행은 단기적인 일탈이 아니라 자신의 취향을 재확인하고 더욱 발전시키는 일상의 연장선 상에 있다.


   열 편의 에세이는 멀리 북구의 아이슬란드부터 가까운 일본 구마모토까지 다양한 지역을 다룬다. 이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띈 지역은 보스턴. 에세이들 중 두 편이 보스턴 이야기인 탓도 있고, 내가 직접 가본 곳이라 더욱 생동감 있게 느껴진 까닭도 있다. 보스턴에 대해 풀어간 두 편의 에세이, <찰스 강변의 오솔길> 그리고 <야구와 고래와 도넛>을 읽으며 자연히 무라카미의 보스턴과 나의 보스턴을 비교하게 되었다.


생애 첫 풀코스 마라톤 ⓒKageyama Masao(1983)


   내가 보스턴을 방문한 것은...이라고 시작하면 조금 진부하지만, 어쨌든 2014년 여름에 미국 동부 지역을 여행하던 중 일정 막바지에 보스턴에 가게 되었다. 꼭 가고 싶었던 건 아니고, 그냥 보스턴이 그곳에 있어서 '들렀다'고 하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 직전에 방문한 몬트리올과 귀국편 비행기가 뜨는 뉴욕의 중간쯤에 있어서 버스도 환승할 겸 보스턴도 둘러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래서인지 보스턴은 당시 한 달 동안의 여정 중 가장 재미없었던 도시로 내게 기억되어있다. 보스턴은 아무 잘못이 없으니 내 보스턴 여행이 진부했다고 하는 편이 옳겠다.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이나 프리덤 트레일(Freedom Trail)은 교과서와 <걸어서 세계 속으로>에서 들어봤지만, 그 외엔 보스턴에 대체 뭐가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방문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곳인지 모르니 '남들 다 하는 걸 해보자'라고 생각했다. 일단 관광객들을 따라 '덕 투어(Duck Tour)' 버스에 올라 시티투어 한 바퀴. 그다음은 하버드에 가서 하버드 동상 발등 만지고 오기.(나중에 자식이 하버드에 입학한다고 한다) 가까운 MIT에 가서 실험실을 훔쳐보기도 했다. 구경 다니는데 전망대를 빠뜨릴 수 없으니 존 핸콕 타워 전망대에 올라 인증샷도 남겼다. 무난한 투어 일정이지만 뭔가 큰 재미도, 감동도 없었던 날들이었다.


'남들 다 하는 걸 해보자'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행기를 읽고 돌이켜 생각해보니, 배경지식이 없었던 것보다 더 큰 문제는 당시 나에게 뚜렷한 취향이 없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여행지에서 뭘 해야 하나 막막할 때가 있는 건 누구나 마찬가지다. 이때 취향이 확실한 사람이라면 이때 갈 곳을 쉽게 찾을 수 있다. NBA 팬이라면 셀틱스(Celtics) 경기를 보러 가면 되고, 미식가라면 랍스터와 클램 차우더 맛집만 찾아다녀도 만족스러울 것이다. 무라카미의 경우에는 계절마다 찰스 강변을 달리며 보스턴을 나름의 방식으로 관찰했다. 반면 취향이 희미했던 나는 판에 박힌 여행을 했고 결과적으로 보스턴에서의 시간이 단조로운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뭐, 누가 '보스턴 가봤나?' 물어보면 '가봤다!'라고 할 정도는 되었지만.


   반면 무라카미의 보스턴에서는 그의 잘 갈고 닦인 취향이 드러난다. 찰스 강변을 달리며 이런저런 생각에 빠지고 도시에서 가장 큰 연례행사인 보스턴 마라톤에도 참가한다. 오랜 야구팬인만큼,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야구장 펜웨이 파크를 찾아 보스턴 야구팬들만의 문화를 발견한다. 고래 구경을 가는 것이나 도시 곳곳에 있는 던킨 도넛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도 지역 문화에 대한 그의 관심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보스턴을 주제로 한 두 편뿐만 아니라 책에 실린 모든 여행기에서 무라카미의 취향을 선명하게 발견할 수 있었다.



   취향은 여행을 특별하게 한다. 가이드북 대신 취향을 따라 여행하면 자연스레 남들과는 다른 목적지를 향하게 된다. 여행에서까지 꼭 타인과의 차별성을 찾아야 될 일은 아니지만, 관광객으로 붐비는 명소와 틀에 박힌 코스에서 한 발 벗어나면 새로운 발견이 우리를 기다린다.(사람이 바글바글한 곳만 찾아가는 게 취향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만약 무라카미가 구마모토 성곽을 아침 일찍부터 달리지 않았다면 구마모토만의 '특유의 자연스럽고 친밀한 분위기'를 온전히 느낄 수 있었을까?


   책 제목이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임에도 불구하고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지는 언급조차 없는 감상이 되어 굳이 클릭해 읽고 계신 분들께 죄송스럽다.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지는 꼭 직접 읽어서 확인하면 좋겠습니다...라는 '출발! 비디오 여행' 식 추천을 드리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보스턴에 관한 두 편의 에세이와 라오스 여행기, 그리고 나머지 일곱 편 모두 매력 있고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글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무라카미의 에세이는 책값이 아깝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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