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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선 Sep 25. 2019

나는 힙하지 않고 싶다

Tea 가 들어있지 않은 흑설탕밀크티를 감수해야한다면

직업상 나는 트렌드에 늘 촉각을 세우고 있다.

요즘 가장 많이 들리는 말이 "힙하다" 이다.

수많은 쇼핑몰과 매체들이 한결같이 큐레이션을 외치는 요즘 본인이 큐레이터임을 목청높여 주장하며 1인 회사를 운영하는 나는 종종 누가 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 뜨끔하다.

예술은 유행을 앞서나가다 못해 초월해야 차별성을 유지할 수 있다. 유행을 좇아가서는 절대 초월할 수 없으니 한 발 앞서 먼저 질러주는 아티스틱한 직관이 큐레이터의 핵심 능력이다.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것을 셀렉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게 될 것을 제시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동시에 아티스틱한 여유와는 거리가 먼, 예산과 시간이 한정된 두 아이의 엄마로 생활인이기도 하다.

이런 이중적인 두 업계에 동시에 몸담은 나도 힙한 것을 당연히 좋아한다. 해외출장을 가면 빠듯한 일정에도 기를 쓰고 힙하다는 곳을 찾아서 감을 잃지 않으려 노력한다. 얼마전 상하이 출장에서도 아시아의 소문난 핫플레이스인 K11 아트몰을 구경하고 왔다. 타국에서의 견학은 그야말로 구경이니 신나기만 했다.

상하이의 힙플레이스 K11 Art mall에서 발견한 브랜드 이미지, 뭔가 낯설지만 요즘 유행하는 요소가 다 있는 고로 현지에서 힙하다는 것 같아 사진을 찍어온다.
K11 매장내에 설치된 프레스기로 인쇄물을 만들 수 있는 DIY 시설이 되어있는 문구점
K11 같은 층에 있는 미술관에서 전시중인 유럽작가 Kora의 설치 작품


내가 이해하기로 힙하다는 말은
 '억지로 애쓰지 않고서도 자연스러운 매력이 넘쳐나옴. 퀄러티과잉의 컨텐츠에서만 나올 수 있는 언뜻 비치는 어떤 아우라' 같은 것이다. 옆에 있으면 나도 웬지 이 간지부유함의 일원이 된 것만 같이 느껴지는 그런 곳, 그런 사람, 그런 물건 말이다.


그러나 이런 비범한 것들이 흔하게 널려있을 리가 없으니,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든다.

아니나다를까 지난 주말에는 힙한 것의 만행을 목격하기까지 했다.

주말을 맞아 문화계 최대 성수기인 가을 오프닝 행사에 입고갈 옷을 쇼핑하기 위해 좋아하는 브랜드가 입점해 있는 쇼핑몰에 갔다.

퇴근 후에 바로 육아로 투입되어야 하는 워킹맘에겐 오프라인에서 옷을 사는 것 자체가 사치이다. 아이는 워터파크에 아빠와 함께 들여보냈으니 오랜만의 자유에 심취해 시간가는 줄도 모르다 배가 고파온다. 식당을 기웃거렸으나 3시가 넘은 시각에도 줄이 길다. 식당에서 혼자 테이블을 차지할 엄두가 나지 않아 당도와 카페인이 높은 밀크티로 허기를 채우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하고 티숍에 줄을 섰다.

20분을 기다려 평소엔 잘 주문하지 않던 프로모션중인(비싼) 메뉴, 흑설탕밀크티를 받아 한 모금 먹었는데. 이럴수가! 밍밍한 우유에 그냥 설탕을 탄 우유설탕물이 아닌가. 이럴 리 없다. 밀크티라고 써 있는데..

타이페이와 쿠알라룸푸르에서 마셨던 카페인이 들어간 진하게 우려낸 차에 달달하기 그지 없는. 그 맛이 아님을 확인하고 카운터로 가서 뭔가 잘못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원.래. 그렇다는 것이다.

쿠알라룸푸르에서 마셨던 이런 밀크티를 상상하고 주문을 했건만.. 이미지는 내용과 특별한 관련이 없습니다. 출처 : 매일경제


이 체인에서는 흑설탕밀크티 메뉴에 차tea는 원래 함유되어 있지 않고, 물, 우유, 흑설탕 만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럼 우유설탕물을 어째서 밀크티라는 이름으로 팔고 있냐는 내 말에 본사의 방침이라는 말만 반복한다.

우연히 주말에 핫플에 가서 배가 너무 고파서 핫하다는 메뉴를 먹게 된 나는 이렇게 절망한다.

십수년전, 좋아하는 배우 양동근이 나온다는 포스터만 보고 김기덕 감독의 수취인불명이라는 영화를 보러 들어갔다가 처참한 스토리와 화면에 영혼이 탈탈 털리고 나온 어느 저녁처럼 당혹감이 밀려왔다.

작은 매장을 가득 채우도록 길게 줄을 선 젊은이들이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점원을 포함한 사람들은 흑설탕밀크티 처음 먹어봤냐는 표정이다.


오! 이런 기분 익숙하다!

분명 잘못된 일인데 모두 그러려니 하고 너도 그러려니 하라는 껄쩍지근한 분위기.

최근에 힙하다 소문난, 컨텐츠로 공간의 가치를 높였다는 찬사를 한 몸에 받는 서울 한 복판의 복합문화공간에 외국 손님을 데리고 갔을 때에도 겪었던 그 기분이다.

로컬 커뮤니티의(이 단어를 좀 써야 힙하단다) 특성 살린 컨텐츠를 바탕으로 만든, 업계에서 이름을 날리다 마침내 대기업에 고가에 매각되는 EXIT 을 달성한 한 브랜딩 회사가 만든 복합문화공간(서점과 상점, 레지던시를 모두 포함한) 이었다. 외국에서 온 손님을 위해 특별히 휴점일에도 시설을 오픈해 준 담당자는 이곳은 광선의 흐름과  벽돌, 직원들의 태도까지도 통일된 컨셉으로 세심히 관리되고 있다고 했는데 과연 그런 것 같아 감탄을 자아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여기서 몇 시간을 보내야하는 내가 들어갈 수밖에 없는 이 공간에 딸린 카페에서의 경험은 이 멋진 곳에 대한 환상을 깨주었다.

멋진 외모의 직원들이 쉬크하게 왔다갔다하는 이 커피숍에서 나는 차가운 커피와 빵 몇 개를 골랐다. 순서를 기다리는동안 보니 훅 하면 쓰러질 것 같은 후들거리는 흰 종이컵에 찬 음료가 나왔고 빵 몇 개를 고른 손님들은 따로 접시가 없어 자연스레 커피가 나온 묵직한 금속 쟁반째로 음료를 테이블로 운반하려고 했다. 두 번이나 쟁반을 가져가려는 손님에게 멋진 외모의 직원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트레이는 반출이 안되십니다." 그럼 어쩌란 말이냐. 손님들은 무안한 얼굴로 한 손에는 후들거리는 종이컵을 한 손에는 손가락사이에 마들렌을 몇 개씩이나 끼고 위태로운 자세로 그러나 얌전히 테이블로 향했다.

아! 아날로그적 매력과 고퀄러티의 커뮤니티 문화공간을 지향하는 이 곳. 문고리 하나, 화단의 풀 포기 하나도 힙하도록 유지되고 있는 이 곳의 유일한 식음료 업장에서 동네 패스트푸드점보다 못한 불편함을 감수하며, 빵을 손에들고 빵을 포장한 비닐을 주워가며 후들거리는 종이컵에 담긴 음료를 플라스틱 빨대로 마셔야 한다니.

외국손님에게 서울의 핫플을 보여주고자 (자랑하고자) 경기도에서 광역버스를 타고 여기까지 온 나는 민망하기 그지 없었다. 겉보기엔 수수한 이 손님들은 십년전에 서점과 식음료문화공간을 결합한 복합문화공간의 원조로 유명한 대만의 모기업 임원들이었다. 이 공간의 물리적인 세련됨과 고급스러움이 배어나오는 세심한 기획과 상반되는 이 카페에서의 실제 경험은 그래서 더 크게 느껴지고 더 민망했다.



힙함의 아우성들 속에서 남다른 취향의 소유자라고 자부하는 나는 요즘 좀 혼란스럽다.

떨어진 기력을 보충하려 밀크티를 주문했으나 적절한 카페인이 몸에 들어오지 않아 불편한 그런 기분이다. 최고의 힙플레이스 성수동에 있는 회사를 다니는 지인에게 이 경험들을 이야기하니 요즘 힙하면 다 용서된다고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이다.

우리집 다락방 수장고에 있는 이은범 작가의 청자 항아리를 생각하니 마음이 좀 진정된다.

힙한 도시를 떠나 다시 내 세계로 돌아와 좋은 예술작품을 어떻게 가려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며 생각을 정리해 본다. 예술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작품은 그 자신의 논리에 충실한 완성도를 가진 그 무엇이다. 경험많은 큐레이터가 아니라도 상식적인 사고를 가진 편안한 상태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밀도가 높은 창작물의 가치를 알아보고 느낄 수 있다. 누구에게나 이런 예사롭지 않은 울림을 무심한듯 턱하니 줄 수 있는 작품이 좋은 예술작품임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이은범, 연꽃 시리즈 청자 항아리, 2011




왜 이렇게 나는 사소한 것, 밀크티 하나 먹으면서 예술작품과 같은 완성도를 따지게 될까.

우선 남탓을 좀 하자면, 요즘 대부분의 소비재와 공간들이 자신들의 취향과 퀄러티가 예술작품에 가까울 정도의 내공을 가지고 있다며 큐레이터라는 타이틀을 자청한다. 바꿔말하면 힙하다며 광고하며 소비자를 유혹하는 것에 대한 내 나름의 방어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돈이나 물건보다는 내 시간이,
내게 한 번밖에 없는 이 순간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얼마전 모집이 될까 반신반의하며 열었던 원데이 아트클래스에 신청한 분에게 들은 말이기도 하다. 심혈을 기울여 기획했지만 싸지않은 가격의 원데이클래스를 선뜻 신청한 그 분께 조심스레 그 이유를 물었을 때 돌아온 이 대답에 나는 무릎을 탁 쳤다. 황금같은 주말 저녁시간을 엄한 곳에 가서 헛다리 짚는데 쓰고 싶지는 않다는 이 솔직한 말은 서로 조금 아는 사이인 내게는 최고의 신뢰어린 칭찬으로 들렸다.


시간 내어 찾아간 곳에서 Tea없는 밀크티를 한모금 빨았을 때, 우리가 버리는 것은 돈만이 아니다. 뭔가 새롭고 좋은 것을 경험하고자 소중한 시간을 투자한 의도에 대한 배신감과 이 시도가 좋지않은 기억으로 사라져버리는 박탈감은 작은 일이 아니다.  많은 매체와 상업시설, 개인들까지도 힙합을 숭배하는 지금. 힙하다는 말로 다소 질이 낮은 서비스, 과한 가격을 무마하기도 하고, 감히 반기를 들지 못하게 하는 분위기를 암묵적으로 강요하는 일이 많다. 그래서 더욱 이 말이 하고 싶다.

힙하지 않아도 괜찮다.

겉만 보고서도 완성도 높은 내용을 알아볼 수 있을 때 그 때 바로, 힙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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