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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선 Nov 21. 2019

분홍색 불멸

이미 지나갔으나 여전히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


만삭의 나는 집 앞 도서관에 앉아 발굴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무덤 속에서 나온 금붙이가 뿜는 아름다움에 설명할 수 없는 끌림을 느꼈다.

돌이켜보니 전공으로 미술사학을 선택하게 된 것도 아빠가 정기구독하던 노란잡지, 내셔널 지오그라픽 속 사진들 때문이었다. 잡지를 펼치면 시베리아 벌판에서 이집트에서, 남아시아의 바닷속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가득했다. 아직도 살짝 반광이 도는 그 종이에서 나는, 이제껏 맡아보지 못한 달콤하고도 향긋한 종이냄새가 잊혀지지 않는다.


그렇게 나는 변하지 않는 어떤 위대한 것을 향해 삶의 방향을 잡아갔다.

구구절절히 설명하기엔 힘들지만, 유년기엔 클래식 음악가가 되고자 했고 우여곡절끝에 20대에 정신차려보니 미술사 석사논문을 쓰고 있었다.


이렇게 이미 지나갔으나 여전히 존재하는 것에 대한 기나긴 덕질 끝에 나는 아파트 공사장에서 우연히 발굴된 이 옷을 만나게 되었다. 정확히는 이 옷이 나온 무덤의 발굴보고서를 손에 쥐었다.

1996년 12월의 어느 날, 착착 공사가 진행되던 천안의 한 아파트 공사장에서 땅 파는 기계에 단단한 관이 턱 하고 걸렸다한다. 관에서 옷꾸러미에 쌓인 이 분홍옷을 발견했을때, 사람들은 얼마나 놀랐을까.

Copyright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학교 인근의 공사장에서 미이라가 나왔다는 천안캠퍼스의 연락을 받았다.  공사에 앞서 지표조사를 하니 많은 무덤이 발견되어 모두 이장한  공사를 시작했는데 느닷없이 무덤  기가 발견되었다고 했다. 발견 당시 회곽이 너무 두터워 포크레인으로 이를 깨고 관뚜껑을 열어보니 먼저 많은 옷들이 들어있어 이를 모두 걷어내 보니 생생한 미이라가 있었다.
현장에 올라가보니 회곽이 노축된 무덤1기와 더불어 사방에 흩어진 옷감 조각들이 눈에 띠었다. 무덤의 주변은 이미 평탄작업이 완료된 상태였고 중장비의 굉음만이 현장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현장에서 유독 분홍색 옷이 눈에 띠어 이를 촬영했다.
- 분홍단령의 비밀 전시도록, 박경식 석주선기념박물관장의 글 중 발췌-
발굴당시 모래더미에 묻혀있는 분홍색 단령 Copyright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분홍은 언제나 옳다고 했던가

5백년이 지나고도 선연한 분홍빛이 눈부시다. 누군가가 날씰과 씨실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두 겹의 천을 맞대어 묘하게 질서정연한 손바느질로 이 옷을 만들어 냈을 터이다. 이 단령은 특정한 관직에 있는 사람이 출근할 때 입는 일상복이었다. 성균관 임용을 축하하는 회식 자리에서도, 임금의 어진 그리는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추진한 상으로 어진을 그린 같은 화가가 그리도록 하사받은 초상화의 모델이 될 때도 이 옷을 입었다. 무심한듯 품위있게 포즈를 취한 할아버지들의 모습을 조선시대 초상화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들의 운치있는 일상을 그린 수많은 그림들에서 조선시대 남자어른들의 섬세하게 디자인된 일상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체재공 초상 손부분, 1792년, 수원화성박물관



다른 한복이 그렇듯이 완전한 평면재단으로 만들어진 이 옷은 사람의 몸이 들어갔을 때는 넉넉하고 우아한 나른하기까지 한 드레이프를 만들어낼 것이다. 그리고 몸이 빠져나가면 처음 만들면서 옷감을 재단했을 때 그대로의 상태가 된다. 질서정연하지만 유연하게 구현해 낸 바느질 한땀한땀까지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으니 벽에 걸어놓으면 천재화가의 그림처럼 볼 것이 있다. 자꾸 들여다 보고 있으니 옷이 마치 살아있는 듯하다.


이 옷의 정교함과 고급스러움에 대해 한참 상상의 나래를 펴다가 이 옷이 왜 무덤에 들어갔을까 생각해본다. 한벌 만들려면 못해도 요즘 차 한대 값은 나갈 듯한 이 귀한 옷을 왜 무덤에 시신과 함께 묻었을까.

무덤 주인공이 여자인 점을 감안하면, 그녀의 아들이거나 남편, 혹은 죽은 이에게 다정한 후광이 되어주고자 했던 점잖은 누군가의 사연이 담겨있을 터이다.



내게 많은 자유시간을 허락해주었던, 뱃 속에 있던 아기가 지금은 글 쓰고 있는 나를 찾기에 그 남자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편으로 미루어야겠다. 통통한 허벅지를 뽐내는 이 여자아이 덕분에 나는 이제 짧은 글 하나 쓰기 힘들 정도로 바빠졌다. 그래도 임신기간 내내 각종 유물을 들여다본 덕인지(탓인지) 아이 이름이 "진홍"이라는 고전적인 이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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