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애 say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동진 Sep 07. 2022

편지할게요

옆에서 보고 있자면 아이의 일상도 참 바쁘다. 이제 고작 초등학교 1학년생인데, 학교며 학원이며 엄마와 함께 하는 학습지며 할 일이 지천이다. 여덟 살의 나이에 이렇게 재미없는 일들만 하고 살 수는 없지. 그 와중에 티니핑 피규어도 가지고 놀아야 하고, 아빠랑 보드게임도 한 판 해야 하고, 닌텐도 비디오게임도 한 판 해야 하고, 유튜브도 봐야 한다(벌써 구독하는 채널이 서넛은 된다). 그러면서도 건강을 위해 하루 8시간은 충분히 자야 하니, 24시간이 모자랄 수밖에.


여느 때처럼 바쁜 하루를 보내고, 이제 자야 하니까 씻으러 들어가자, 했더니 아직 오늘 할 일을 다 못했단다. 아내 말을 들어보니 오늘 반드시 해야 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딸의 입장에서는 원래 하기로 한 일을 못한 것에 대한 걱정과 아쉬움이 큰 듯,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한다. 오늘은 너무 늦어서 안되니 내일 하자, 했더니 이번에는 또 내일이 되면 잊어버릴까 봐 걱정이다. 그럼 내일 할 일을 미리 적어두고 자자, 했더니 금세 표정이 밝아지더니 메모지를 가져와서 적기 시작한다.


"내일 아침에게"



메모지에 첫마디를 적는 딸을 보고, 어디서 이렇게 문학적인 애가 태어났나 자아도취에 빠진다. <내일 할 일>, <to do list>보다 몇 배는 더 멋들어진 제목이다. 단순히 할 일의 목록을 적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내가 내일의 아침에게 편지를 보내는 그 표현이 순간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그러고 보니 손편지를 쓴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 하다. 아내와 나는 둘 다 손편지를 좋아해서 연애하던 시절에는 틈만 나면 서로에게 편지를 써서 건네곤 했다. 선물을 하더라도 꼭 자그마한 카드를 동봉해서 마음을 더했다. 결혼 후에도 종종 그렇게 편지를 쓰곤 했는데, 이제 결혼 10년 차를 넘기다 보니 언제부턴가 자연스럽게 편지를 주고받는 일이 뜸해졌다.


아이들은 편지를 참 좋아한다. 내용은 별스럽지 않아도, 자기 마음을 연필 끝에 담아 꾹꾹 눌러써서 좋아하는 사람에게 전해준다. 엄마 아빠에게도 주고, 할머니 할아버지한테도 주고, 선생님한테도 주고, 좋아하는 친구에게도 준다. 좋아하는 마음을 전하는 일에 거리낌이 없다. 순수해서 아름답다는 말이 참 잘 어울리는 행동이다. 글을 적다 보니 편지에 대한 많은 추억과 생각이 오간다. 퇴근길에 문구점에 들러 편지지 하나 사야겠다. 요새도 팔긴 하겠지?



딸아, 아빠도 그럴게. 네가 내일 아침에게 편지를 쓰듯이, 세상 만물을 친구처럼 느끼고 친구에게 편지를 쓰듯이 일상을 대하는 너처럼, 아빠도 주변 모든 것을 친구로 대할게. 가끔은 내 마음을 몰라준다며 심하게 다투는 친구도 있겠지. 나에게 아무 관심이 없는 친구도 있을 거야.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순간에 친구들은 우리를 응원하고, 사랑하고, 보듬어 주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게. 그리고 당연히 우리 가족도 그렇게 지냈으면 해. 지치고 힘들 때에도, 기쁘고 설렐 때에도, 언제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너에게 편지를 쓸게. 아빠한테 답장해줄 거지?


오늘도 사랑한다, 딸아.

매거진의 이전글 싫은 건 싫은 거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