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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동진 Oct 25. 2022

나와 구름의 시간

한가로운 주말 오전. 아침을 먹고 나서 개운하게 씻고 나오니, 딸이 거실 한 복판에 누워있다. 옆에는 좋아하는 인형 친구들을 데리고서 큰 대자로 뻗은 채로, 아무런 말도 없고 움직임도 없이 베란다만 바라보고 누워있다. 아침부터 뛰어 논 것도 아닌데, 뭐가 피곤해서 저러나 싶어 궁금증이 돋는다.


"딸, 누워서 뭐해?"


"응, 구름이 흘러가는 걸 보고 있어."



그러고 보니 누워서 바라보는 시선이 베란다 창 쪽이다. 빼꼼히 창 밖 하늘을 보니, 멋들어진 양떼구름이 햇살을 받으며 유유자적이 흘러가고 있었다. 아, 지금 생각해도 정말이지 멋진 풍경이었다. 그리고 이런 풍경을 이렇게나 제대로 즐기고 있는 딸의 모습이 나에게는 또 하나의 멋진 풍경이었다. 오늘도 딸 바보 인증.


같은 회사, 같은 팀에서만 13년째 근무하고 있는 나는 속된 말로 '짬이 좀 차는' 연차에 속한다. 팀 내 모든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빠삭하고, 이때 즈음이면 무슨 일이 시작되는지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업무 자유도가 높은 편이라, 예기치 못한 상황이 아니라면 스스로 워라밸 관리가 웬만큼 가능하다. 바꿔 말하자면 이는 자유롭게 여가시간을 사용할 수 있는 뜻이다.


이 글을 읽는 몇몇 직장인들이 부러워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하지만 사용할 수 있는 여가시간이 많다는 것과, 이를 잘 활용할 수 있는가는 또 다른 이야기이다. 돈을 많이 버는 것과, 번 돈을 잘 쓰는 것이 다른 것과 같은 맥락이다. 사회 초년생 시절에는, 뭔가라도 하지 않으면 흘러가는 시간이 아까워서 마음 편히 쉬지도 못했던 것 같다. 일단 어디든 나가고 본다. 캠핑을 가든, 극장을 가든, 쇼핑을 가든. 집에 가만히 있는 걸 견디지 못했다. 그러다 언젠가부터는 그러한 취미생활들에도 싫증이 나서, 최근에는 그냥 TV를 보거나 만화책을 보며 시간을 죽이고 있는 듯하다. 말 그대로, 매 주말 여가시간을 죽이고 있는 연쇄시간마이다.


온전히 머리와 마음을 비우고 힐링으로 여가시간을 채우던 게 언제였는지 돌이켜본다. 딸아이처럼 흘러가는 구름을 보며, 지나가는 개미들을 보며, 귓가를 스치는 바람을 느끼며 시간을 보낸 적이 나도 분명 있기는 했는데,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 하다. 언제부터였을까. 항상 분주하거나, 무료하거나 둘 중 하나의 시간만 보내온 듯하다. 내 안의 소리를 듣는 시간은 나의 이십 대와 함께 실종되었다. 오늘도 이렇게, 내 인생의 1/4 밖에 살지 않은 딸에게 인생의 소중한 무언가를 배운다.



딸아, 아빠는 네가 앞으로도 그렇게 자기만의 시간을 가질 줄 알고,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해. 흔히들 자기 자신의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고들 하지만, 실제로 온전히 자신의 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는단다. 하지만 그건 굉장히 중요한 거야. 앞으로 너에게는 많은 선택의 순간이 찾아올 테고, 그때마다 주변의 소리에 흔들리지 않고 네가 바라는 방향으로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너 자신의 소리가 무엇인지를 평소에 잘 깨닫고 있어야 해. 이번 주말에는 아빠랑 같이 거실에 누워 함께 구름이 흘러가는 걸 보자. 벌써부터 그 시간이 기다려진다.


오늘도 사랑한다, 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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