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보다도 전통주를 섹시하게 마시고 싶은 세 여자의 술 투어, 세 번째
요즘 만나는 사람마다 여름휴가에 대해 묻는다. 이야기를 하다 보면 누구는 베트남에, 누구는 태국에, 또 다른 누군가는 필리핀에 가 있단다. 아, 부럽다. 이제 와서 해외여행을 준비하자니 바캉스 시즌도 끝물. 올해는 마음 맞는 두 술꾼과 함께 가까운 곳으로 휴가를 떠나기로 작정했다.
가장 먼저 더운 건 질색하는 신쏘와 박 언니를 어르고, 달래는 일부터 돌입. 끈질기게 구애의 메시지를 던지고 나서야 간신히 'OK' 신호가 떨어졌다. 그제 서야 모두를 만족시키는 그런 스케줄을 짜보란다. 두 여자의 바람을 요약해보면 총 세 가지이다. 잔뜩 술잔을 기울일 수 있고, 바다가 있어야 하며, 서울과의 거리가 두 시간 안팎인 곳. 아, 이 여자들 참 까다롭기도 하다.
그래서 고르고, 고른 곳이 어디냐고? 바로 양조장 바캉스이다. 지난 며칠간 살벌하게 키보드를 두드리며 찾은 결과, 충남 당진과 예산에 있는 신평양조장과 예산 사과 와이너리를 선택했다. 이 두 곳을 선정한 이유는 간단하다. 딱 저 세 가지 조합에 완벽하게 부합하니까. 당진과 예산은 충남 초입이라 서울에서 고속버스로 두 시간 안팎이고, 양조장이니 술 문제는 해결, 게다가 서해바다까지 끼고 있으니. 맛과 멋과 흥에 잔뜩 취할 수 있는 이 얼마나 환상적인 조합인가…
드디어 떠난 바캉스, 체감 온도 무려 39도. 정말이지 무진장 덥다. 뙤약볕 아래서 드라이기를 입에 물고 있는 것 마냥 공기는 물론 바람까지도 뜨겁고, 가만히 서있기만 했는데도 등줄기로 땀이 줄줄 흘러내린다.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원래 기온이 30도는 넘어야 제대로 된 바캉스이고, 이럴 때 마시는 막걸리가 진국이라며 이 더위를 이겨낼 수밖에.
신평양조장은 당진터미널에서 차로 15분, 시간이 멈춘 것처럼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신평면에 위치해있다. 1933년 설립됐는데, '신평(新平)'이라는 이름은 새로운 땅, 새로운 들이란 뜻이란다. 이름에 걸맞게 신평면에는 넓고 새로운 땅인 간척지 평야가 넓게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신평양조장에서 빚는 술도 이곳에서 재배하는 해나루쌀을 사용한다.
이곳에서는 막걸리 칵테일 만들기를 비롯해 막걸리 빚기와 막걸리 소믈리에 클래스, 증류주 체험과 누룩전 만들기 등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체험은 15명 이상의 단체 신청이 가능한데, 운이 좋아 이곳을 방문한 다른 관광객들과 함께 체험을 진행했다.
잔뜩 마시자는 여행 취지에 맞게 우리는 막걸리 칵테일 체험에 도전. 총 두 종류의 막걸리 칵테일을 만들어볼 수 있는데, 인당수에 빠진 심청의 효심을 생각하면서 만든 칵테일 '인당수'와 황진이의 사랑을 표현했다는 '러브 황진이'이다. 그동안 생 하얀 연꽃 백련막걸리만 마셔봤지, 이 녀석을 베이스로 한 칵테일은 첫 경험! 갓 짜낸 우유처럼 뽀얀 막걸리가 콸콸 쏟아지는 모습이 숨겨져 있던 식욕을 자극한다. 하악하악.
이름에 어울리게 푸른빛이 도는 인당수는 하얀 연꽃 백련막걸리 특유의 톡 쏘는 청량감은 그대로 살리면서도 좀 더 달콤하게 풀어낸다. 첫맛은 우유처럼 입안에 부드럽게 감기면서 달콤한데, 끝은 은은한 탄산감이 개운하게 스친다. 아, 이 무더위를 뚫고 온 보람이 있다. 신쏘는 부담스럽지 않고, 고르게 올라오는 탄산감에 달콤하기까지 하다며, 이건 명백한 작업주란다. 썸남을 내 남자로 만들고 싶은 여자들의 앙큼한 유혹주라나?
인당수를 마셨으니 러브황진이도 마셔봐야지. 러브황진이는 하얀 연꽃 백련막걸리에 크랜베리 주스와 복숭아 리큐르를 넣는다. 핑크빛이 감돌고, 은은한 복숭아 향이 난다. 음, 식후 디저트로 마시고 싶은 맛이다. 딸기 혹은 복숭아 요구르트가 떠오는데, 병째 벌컥벌컥 마시고 싶어 진다. 기분 좋은 과실향과 청량한 마무리. 캬아~
막걸리도 마셔봤겠다. 주종을 바꿔서 와인을 마시러 예산 사과 와이너리로 출발. 신평양조장에서 차로 30분. 꼬불꼬불한 시골길을 따라 움직이면 2만 3,000여 평방의 푸르른 사과밭이 나온다. 완전히 여물기를 기다리고 있는 물기 어린 초록색 사과들이 주렁주렁. 아, 찐득찐득한 더위 속에서도 상큼하기 그지없다.
본격적인 와인 얘기에 앞서 예산 사과 와이너리에 대해 알고 넘어가야지. 예산 사과 와이너리에서는 가을의 사과라는 의미이자, 예산에 머물렀던 명필가 김정희의 호를 딴 '추사'라는 이름의 사과와인을 만들고 있다.
특히 이곳을 바캉스 코스로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체험! 사과와 관련한 다채로운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사과파이와 사과잼 만들 수 있고, 무엇보다도 시원한 지하 저장실에서 와이너리 투어를 할 수도 있다. 이때 추사 사과와인은 물론 프랑스산 오크통에서 막 뽑아낸 50도가 넘는 사과 브랜디도 맛볼 수 있으니, 완전 감동이잖아?
와이너리에서 마시는 곧바로 마시는 와인이라니! 시원하고, 달콤한 사과와인에 생생함이 더해져 입앗에서 맛있다고 난리법석. 알코올이 전혀 느껴지지 않고, 향긋한 사과향과 부드러운 청량감이 차원이 다르다. 그냥 엄지 척! 화려한 향과 맛은 입안을 가득 채우는데, 전혀 무겁지 않고 호로록호로록 넘어간다. 도대체 무슨 말이냐고? 소름 끼치게 맛있다는 뜻이다.
오크통에서 막 뽑아 마시는 브랜디 얘기도 안 할 수 없지. 추사 브랜디는 달콤한 사과와인을 증류해서 만든다. 3년 이상 오크통에서 고이고이 제 몸을 단련한 탓인지 50도라는 알코올 도수가 믿기지 않을 만큼 부드럽다. 게다가 위스키처럼 달콤한 향도 나고, 색상도 연한 황금빛. 이 녀석, 아주 제대로 영글었다. 영글었어.
브랜디까지 마시고 나니 오늘의 체험은 모두 끝. 양손에는 이미 와인이며, 막걸리며 잔뜩 들려있다. 아, 바캉스라고 모자에 선글라스, 입술까지 벌겋게 칠하고 왔는데… 양조장 재미에 정신 팔려 화장이고, 스타일이고 모두 뒷전. 일단 양손 가득 들린 이 녀석들부터 마시고 봐야겠다. 39도의 여름날보다 더 뜨거운 바캉스의 밤. 우리 술과 함께. Let's go!
장기자: 양조장 취재 몇 번 다녀온 거로 '나 술 좀 알아.' 폼 좀 잡다가 큰코다친 애송이 기자이다. 목표는 프로 애주가! 전통주 공부를 핑계로, 두 여자를 살살 꼬셔 신나게 술 투어를 다니고 있다.
신쏘: 듣기에도 생소한 전통주 소믈리에이다. 맨날 전통주만 마실 것 같지만, 주량에 대해 물어보니 '맥주 다섯 잔'이라고 얘기하는 우리의 드링킹 요정. 단순히 술이 좋아 시작한 게 눈 떠보니 업으로 삼고 있다.
박언니: 자타공인 애주가. 술 좋아하는 고주망태 집안에서 태어나 '난 절대 술은 안 마실 거야'라며 주문처럼 다짐했다지만, 막상 성인이 되어서 가장 먼저 사랑하게 된 것이 술이었단다. 느지막하게 열공모드에 돌입, 얼마 전에는 직접 일본으로 날아가 사케 소믈리에 자격증도 따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