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03월 - 영화하는 여자들
1. 내일은 드디어, 눈물 콧물 없이 볼 수 없는 이 시대 최고의 코미디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개봉 날이다. 이 시국은 재미없는 일상에 유일한 빛이 되어준 수영도 마작도 앗아가 버릴 만큼 무자비한 녀석이지만, 찬실이만큼은 복이 많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내게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하게 되는 일'에 관한 이야기여서, 앞으로 누군가가 “정미 씨는 무슨 일을 하세요?"라고 물을 때에 "저는 어쩌면 사람들의 등 뒤에서 손전등을 켜는 일을 하나 봐요"라고 대답할 수 있게 해준 영화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내가 했던 일, 지금 하는 일, 앞으로 할 일 모두 딱 떨어지는 무언가로 설명하기 힘들고, 도대체 뭔지 모르겠고, 가끔 너무 미울 때에 찬실과 장국영 유령을 떠올리며 버텨보기로 했다. 김초희 감독님이 “이런 시국에 영화를 개봉한다는 건 비 오는 날 횟집에서 조용히 회를 먹는 일만큼이나 경건한 것”이라고 했으니, 나는 곧 경건한 체험을 또 하러 갈 것이다. 아 참, 작년부터 이상하게 찬실과 룩이 겹친다. 운명이 아닐 리 없다.
2. 솔직히 말하자면, 90년대 영화 동아리 출신 시네필을 동경한다. 아직 로망이 있다. (물론 아마 내가 그 시절에 태어났다고 해도 너무 게을러서 프랑스 문화원도, 독일 문화원도 가지 않았을테고, <카이에 뒤 시네마>나 <키네마 준보>를 읽기 위한 외국어 공부도 고민만 하다 시작도 안 했을테고, AFKN을 트는 일도 거의 없었으리라는 것을 안다.) 아무튼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내가 살아보지도 않은 시네필의 시대를 추억하는 영화다. 당신이 살아보지도 않은 과거에 노스텔지어를 느끼는 뉴트로 러버라면―물론 나는 뉴트로 염불이 너무 싫고, 이 영화를 이렇게 말하는 것도 정말 싫지만, 지금으로서는 딱히 떠오르는 말이 없다― 이 영화를 봐야만한다. 런닝샤쓰만 입은 장국영과 찬실이 <키노>와 VHS 테이프가 쌓여있는 방에서 삶을 나누고, <정은임의 FM 영화음악>이 흐르고, 오즈 야스지로가, 에밀 쿠스투리차의 <집시의 시간>이 인물들의 대화에서 핑퐁핑퐁 오고갈 때, '아, 나도 어쩌면 영화를 진짜 사랑할지도 몰라' 싶다. 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집주인 할머니 역할로 나오는 윤여정 선생님과 '시'를 나누는 장면이다.
3. <기생충>의 수상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간 한국 영화계에서 크게 주목받아 온 사람은 거의 모두 남성들이었지만, '카메라 뒤, 크레딧 위'에는 정말 멋진 여자들이 많다. 아마 오늘도 영화판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세상에 태어날 수많은 영화를 정말 열심히 만들고, 정말 열심히 알렸을 것이다. 나는 영화판에 반 발짝도 들어가지 않았지만, 어쨌든 한 발짝 걸칠 뻔했던 사람으로서 멋진 여성들을 그간 정말 많이 만났다. 얼마 전에는 독립영화 인터뷰 매거진 <NOW>를 통해 ‘화인컷’ 서영주 대표, ‘쇼박스’의 안정원 이사와 함께 해외배급 1세대로 불리는 '엠라인디스트리뷰션'의 손민경 대표와 곧 넷플릭스에서 공개될 <보건교사 안은영>을 비롯해 여러 여성 독립영화 감독과 작업한 이영림 편집기사를 만났다.
4.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출판한 『다시 만난 독립영화』에 조그맣게 참여하면서 선생님들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올해 40주년을 맞은 '서울대학교 얄랴셩 영화 연구회'의 작품 제작기. (<서울 7000>은 아주 대단해서 차마 글로 그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가 없다.) '장산곶매'의 <파업전야>를 상영한다는 이유로 헬기까지 띄워 학생들을 잡아가던 90년대 대학가 이야기, 전국 대학가 순회 상영을 위해 몸에 스크린 대용으로 쓸 광목천을 온 몸에 둘둘 감고 숨어다니며 프린트한 필름을 숨겨 배급하던 이야기, 검열과 폭력 이야기 같은 것들.
5. 2019년은 바리터가 30주년을 맞은 해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장산곶매가 영화를 만들어 전국 대학에 이름을 알리던 그 시절, 여성주의영화집단 '바리터'와 한국여성민우회가 <작은 풀에도 이름 있으니>를 만들었다. 김소영 감독이 연출한 이 영화는 변영주 감독이 처음 카메라를 잡아 촬영감독으로 데뷔한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 속 상황이 <82년생 김지영>에 등장하는 지금 상황과 변한 게 하나 없어, 상영관에서 깔깔 대잔치가 열리기도 했다. 기존 노동영화가 생산직 현장 노동에 집중하던 것에서 벗어나, 최초로 '사무직 여성의 노동'에 초점을 맞춰, 영화하는 여성들의 우정과 신뢰로 제작한 영화다. 하지만 당시 바리터가 이룬 성취를 조명하기는커녕 바리터를 두고 '빨래터'라든가 '파리떼'라고 비난하는 단체가 많았다고 한다. 여성의 성취를 이야기할 때, 여성혐오를 떼어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는 점이 정말 화가 난다.
작년에는 '영페미니스트'의 현재를 따라가는 강유가람 감독의 <우리는 매일매일>과 페미당당의 이야기를 담은 진성연 감독의 <해일 앞에서>도 보았다. 세 작품이 90년대 이후 현재까지 한국의 페미니즘 역사를 보여주는 무척 훌륭한 작품들이라는 점에서, 묶어 상영하고 다 같이 모여서 신나게 수다 떠는 자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어렴풋이 생각했다.
6. 서독제 독립영화 아카이브전에는 김소영 감독의 초기작 <겨울환상>과 <푸른 진혼곡>도 함께 상영했는데, 여성의 욕망, 퀴어적 시선을 실험적으로 담아낸, 김소영 감독의 영화 미학을 축적해놓은 작품이다. 시간을 넘나드는 숏과 숏의 연결이 몹시 아름다워서 가끔 볼 수 있게 두 작품을 간직할 방법이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관객과의 대화에서 감독님이 30년 만에 자신의 영화를 인정해주는 관객들이 있어 몹시 감동이라며 눈물을 살짝 보이시는 것을 보고 나도 따라 울 뻔했다. 그리고 감독님의 영화가 너무 좋아서 책에 사인도 받았다.
7. 앞으로 내가 영화 관련 무엇무엇을 다시 하는 날이 올까? 아무튼 확실한 것은 문화예술계를 빙글빙글 돌면서 씬의 언저리에서 엄지발가락 정도를 넣었다 뺐다 하며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는 것이다. 표현은 못 하지만, 그 씬에는 같이 시간을 보낸 내가 좋아하는 여성들이 잔뜩 있다. 이 기회를 빌려 모두에게 사랑을 전한다. 모두가 '복' 많이 받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