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정치에 스며든 해외 보수 사상
뉴질랜드 정치 지형에서 ACT Party (ACT 당) 대표 데이비드 시모어(David Seymour)의 부상은 단순한 국내 정치 현상으로만 보기 어렵다. 최근 RNZ 다큐멘터리(www.youtube.com/watch?v=QLOjiiC3P1Y)는 시모어의 정치적 의제 형성에 캐나다를 비롯한 해외 보수 사상가들의 영향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그가 캐나다 프런티어 센터(Frontier Centre for Public Policy: fcpp.org)에서 근무하며 교류한 톰 플래니건(Tom Flanagan) 교수의 원주민 정책 사상은 현재 뉴질랜드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ACT당의 마오리 정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시모어가 캐나다에서 접한 플래니건 교수의 사상은 충격적이다. "번영은 스스로 만들어야 하며 정부가 줄 수 없다", "문명화된 민족과 비문명화된 민족 간에는 차이가 있으며, 정부의 역할은 비문명화된 민족을 문명화된 사회로 통합하는 것"이라는 주장은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의 논리를 연상케 한다. 시모어는 자신의 저서 'Birth of a Boom'에서 이러한 플래니건의 원주민 정책론을 인용했고, ACT당의 실용 정치 학교에서 추천 도서로 활용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사상적 배경은 시모어가 추진하는 마오리 정책의 본질을 이해하는 열쇠다.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겉보기에 합리적인 구호 뒤에는, 원주민의 역사적 특수성과 권리를 부정하고 획일적인 '문명화' 기준을 강요하는 논리가 숨어있다. 실제로 시모어는 마오리 관련 정책이 "폭동 이상의 혼란", 심지어 "내전"을 일으킬 수 있다고 언급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이는 정책 추진자가 자신의 정책이 가져올 사회적 갈등을 충분히 인지하면서도 강행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시모어의 해외 영향은 원주민 정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국회의원이 되기 전 기후과학에 대한 회의론을 주장하는 논문을 공동 저술했다. 인위적 지구온난화 가설이 틀렸다면 경제적 희생이 무의미하다는 논리는, 기업의 이익을 환경보다 우선시하는 전형적인 보수 싱크탱크의 주장과 맥을 같이한다. 프런티어 센터에서의 경험이 그의 기후변화 정책과 원주민 권리에 대한 입장 형성에 영향을 미쳤으며, 이는 모두 산업과의 파트너십, 즉 기업 이익을 중심에 두는 방향으로 수렴된다.
시모어가 신봉하는 자유시장 만능주의는 정부의 역할을 극도로 제한하면서도, 아이러니하게도 원주민을 '문명화'시키는 데는 적극적인 정부 개입을 주장하는 모순을 보인다. 이는 자유시장 이데올로기가 실제로는 기득권의 이익을 보호하는 도구로 활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큐멘터리에서 드러난 ACT당 내부의 권위주의적 문화도 주목할 만하다. 한 전직 당원은 북해안 퍼시픽 커뮤니티와의 소통에 대해 조언을 구했다가 시모어로부터 "팀 플레이어가 아니다"라는 비난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자유를 표방하는 정당이 정작 내부에서는 자유로운 의견 개진을 억압한다는 것은 이 정당이 추구하는 '자유'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의문을 품게 한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시모어가 의도적으로 사회 분열을 조장하는 정책을 추진한다는 분석이다. 그의 마오리 정책 법안(Treaty Principles Bill)이 112대 11로 압도적으로 부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같은 주장을 반복하는 것은, 정책의 실현보다는 정치적 지지층 결집을 노린 전략으로 보인다. 실제로 ACT당은 시모어의 리더십 하에서 2017년 0.5%의 지지율에서 2020년 11석을 확보하는 성과를 거뒀다.
뉴질랜드는 독특한 역사와 문화를 가진 나라다. 특히 마오리와의 관계는 와이탕이 조약(The Treaty of Waitangi) 이래 이 나라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핵심 요소였다. 그런데 캐나다의 실패한 원주민 정책 사상을 그대로 들여와 적용하려는 시도는 위험천만하다. 캐나다의 거주학교(Residential School, brunch.co.kr/@archivist/3) 정책이 가져온 비극적 결과는 이미 국제사회가 인정한 문화적 대학살이었다. 그럼에도 시모어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마저 부정하려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해외 보수 싱크탱크와의 네트워크를 통해 형성된 시모어의 정치 의제는 뉴질랜드의 현실과 동떨어진 이념적 실험에 가깝다. 기후변화 부정, 극단적 자유시장주의, 원주민 권리 축소 등은 모두 미국과 캐나다의 보수 진영에서 유행하던 낡은 레퍼토리다. 이미 그 한계와 폐해가 드러난 정책들을 뉴질랜드에 이식하려는 시도는 시대착오적일 뿐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하다.
정치인이 해외에서 경험을 쌓고 견문을 넓히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타국의 실패한 이념과 정책을 무비판적으로 수입해 자국에 적용하려는 것은 다른 문제다. 특히 그것이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권리를 침해하고, 환경을 파괴하며, 사회 분열을 조장하는 방향이라면 더욱 그렇다.
뉴질랜드는 마오리와 파케하(유럽계)가 함께 만들어온 독특한 다문화 사회다. 이러한 특수성을 무시하고 북미의 실패한 동화주의 정책을 답습하는 것은 역사를 거스르는 일이다. 시모어와 ACT당이 진정으로 뉴질랜드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해외 보수 이념의 앵무새가 되기보다는 이 땅의 역사와 현실에 뿌리를 둔 정책을 개발해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다양한 정치적 견해가 경쟁하는 것은 건전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수입된 극단주의 사상에 기반해 사회 통합을 해치고 역사를 부정하는 방향으로 흐른다면, 시민들은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데이비드 시모어의 정치적 행보가 보여주는 것은 글로벌 보수 네트워크가 각국의 정치에 미치는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그리고 그것을 경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