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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매이 Oct 15. 2024

구직급여 받는데 회사가 뭘 도와줘?

해고당한 방송작가와 예술인 고용보험

웨이브 오리지널 콘텐츠 가운데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라는 드라마가 있다.

올림픽 사격 금메달리스트로 '90년대 김연아'라 불린 스포츠 스타 [이정은]의 정치 역정을 다룬 블랙 코미디인데 그의 남편 [김성남] 캐릭터가 특히나 풍자적이다. 허우대 멀쩡하다고 가끔 방송 섭외 좀 받는, 케이팝부터 떡볶이까지 입 안 대는 분야가 없지만 대충 정치 평론가로 퉁 치는, 논객 축에 낄까 말까 한 지식인이 바로 [김성남]이다.

그는 잔뜩 술에 취해 식당 계산대 앞에 서서 "(술값) 결제 도와드리겠습니다."라는 종업원에게 되묻는다.


"결제를 도와드리겠다는 말이 나는 너무 재밌어요. 이상하지 않아요?

나 뭐 몇만 원 도와줄 거예요? 보태줄 거예요?"


딴에는 날카로운 지성을 뽐내며 문장의 오류를 재치 있게 지적한다고 생각했겠지만, 그 자리에서 웃는 건 [김성남] 뿐이었다. 게다가 이어서 "일시불로 도와주세요."라며 이죽거려서 결국 종업원의 감정노동 강도만 높였다.


그런데 해고당하는 과정에서 나도 [김성남]의 대사가 떠오른 순간이 있었다.


이메일로 도착한 해고 통보서를 열어서 읽고 있는데 E국장이 사무실로 찾아왔다.

마주 앉자마자 사람 자르는 게 참 힘들다며 푸념부터 늘어놓은 E국장은 나에게 '도울 일이 있으면 말해달라'고 했다.

대체 회사가 뭘 도와준다는 것인지 물어봤다.

E국장은 이렇게 답했다.

"어쨌든 권고사직으로 처리될 것이니 실업급여를 받는다든가..."


아니 구직급여를 받는 데에 회사가 뭘 도와준다는 것일까.


사실 방송작가가 구직급여를 수령할 수 있게 된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방송작가나 프리랜서 PD 등은 대다수 특수고용직으로 노동법상 근로자에 해당하지 않아 건강보험과 국민연금은 지역가입자로 처리되었고 고용보험은 아예 대상이 되지 않았다. 예고없이 프로그램이 폐지되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다른 직종보다 빈번하게 실업을 경험하지만, 방송작가들은 퇴직금 없이, 구직급여 없이 오로지 혼자만의 힘으로 소득 절벽에 대비해야 했다.

그러다가 2020년 12월 10일 [예술인 고용보험]이 시행되면서 구직급여나 출산 전후 급여 등의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보험료는 예술인이 받는 보수에 1.6%인데 예술인과 사업자가 0.8%씩 반반 부담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십수 년 방송일을 하면서 내가 처음 갖게 된 안전망이었다.


이번에 1년 반 동안 한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수입의 0.8%를 꼬박꼬박 고용보험료로 냈으니 해고당한 뒤에 내가 다음 일자리를 구하기 전까지 서너 달은 구직급여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회사가 왜 도와준다고 말하는 거지?


술 취한 [김성남]처럼 E국장에게 물어볼 걸 그랬다.

"구직급여 수령을 도와준다는 말이 너무 재밌네요. 뭐 몇만 원 도와줄 거예요? 보태줄 거예요?"

혹시 회사에서 월 100만 원 정도 얹어 주겠다는 좋은 뜻으로 한 말인데 내가 못 알아들은 걸까.


돌이켜보면 E국장은, 아니 회사는 내내 그렇게 시혜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실제로 뭐 코딱지만한 것 하나라도 떼주고 그랬으면 참을만 했을텐데 주는 것도 없이 베푸는 척 했다는 게 가장 황당한 점이다.

초반에는 '스스로 사직할 선택권을 주겠다'고 했고 나중에는 손해배상을 운운하며 '계약 해지에 합의할 기회를 주겠다'는 식이었다. 사직하지 않겠다, 는 나의 결정이나 갑질이나 언어 폭력을 하지 않았다는 내 변론은 전혀 들어주는 시늉조차 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런데 해고통보를 하는 순간까지도 '구직급여 수령'을 마치 회사가 도와주는 양 굴다니. 대체 그들에게 노동은 무엇이고 노동자는 무엇이며 나라의 법은 또 무엇인가. 애초에 나를 자신들과 같은 사람으로 보긴 하나.


마지막 출근, 아니 퇴근을 하고 얼마 뒤, 고용보험 상실 통보서가 도착했다.

회사에서 신고한 상실 사유는 '피보험자(예술인, 노무제공자)의 귀책 사유에 의한 계약 해지'였다. 혹시나 해서 공단에 전화를 걸어 물어보니, 상실 사유 코드 26번은 경우에 따라서 구직급여를 수령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했다.

상담원의 답에 불안감이 밀려드는 것은 당연했다.

구직급여 한 달 치는 E국장 정도 직급의 정규직에게 주급 정도밖에 되지 않을 텐데 일자리를 잃은 방송작가에게는 참으로 큰 금액이라 못 받을까 봐 초조해졌다. 그걸 도와주느니 마느니, 했구나. 문득 왜 내 몫이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수치심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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