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 시대에 이 극의 흥행은 어떤 의미일까
2001년 작 뮤지컬 영화 [헤드윅].
언제쯤 봤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OST를 듣고 또 들었던 기억이 난다.
첫 넘버 'Tear Me Down'부터 폭발하는 마이너리티와 저항의 에너지에 20대의 내가 빠져드는 건 당연한 일. 게다가 'Origin Of Love' 넘버에 담긴 쓸쓸하고 로맨틱한 정서도 사랑했다.
다시 십수 년이 흘러(이제 내 나이 아흔아홉(*아님)) 무대에서 만나는 뮤지컬 [헤드윅]은 새로웠다.
처음 영화로 만났을 때와 세상도 바뀌었고 나 역시 세상을 더 알게 됐고 소외와 고독의 정서를 20대보다는 좀 더 이해할 나이가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여성, 이주노동자, 트랜스젠더를 비롯한 성소수자, 난민 등 소수자들을 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과 태도가 떠올라 다시 곱씹어 보게 되는 극이었다.
2021년 시즌 뮤지컬 [헤드윅]은 다섯 명의 배우가 연기하고 (이츠학 역은 4명의 배우) 나는 그중 두 배우를 먼저 만났다. 극의 형식이 헤드윅의 콘서트이다 보니, 각 배우마다 저마다의 헤드윅을 창조해서 무대에 서고 그날의 흐름에 따라 배우 따라 극의 정서도 약간씩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이제부터 쓰게 될 후기는 딱히 특정 배우의 디테일에 의존한 감상은 아니지만 일단 내가 만난 '헤드윅'에 한정된 것이라고 해두겠다.
헤드윅, 그는 젠더 퀴어, 이민자, 성노동자이며 정치적 상황에서는 난민으로도 볼수 있다.
하지만 불법 체류 신분인 동료들의 여권을 볼모로 그들을 억압하는 미국 시민권자이기도 하다.
원래 모든 개인 안에는 여러 가지 정체성이 중첩되어 있고 상대적 소수자이면서 상대적 다수자이기도 하니까. 복잡하고 특수하지만 익숙한 정체성의 교차로.
첫 넘버 'Tear Me Down'은 '그런 내가 이 시대의 새로운 베를린 장벽'이라는 헤드윅의 선언이다.
동독과 서독을 가르는 이념의 경계인 베를린 장벽처럼 여자와 남자라는 성별 이분법의 사회에서 그 경계에 자리한 존재, 헤드윅.
자조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극을 여는 지점에서는 선언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장벽은 단순히 경계나 한계에 그치는 건 아닌 것 같다. 여자와 남자 사이에 선 헤드윅의 존재는 두 가지 성별밖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정상성 사회의 균열이기도 하고 어쩌면 장벽 너머를 상상하게 하는 가능성이기도 하니까.
게다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같은 이념의 대립이 흐릿해진 지금은 사회의 성원권을 두고 국지적인 대립이 계속되고 있으니, 젠더 퀴어인 '헤드윅'의 존재는 실제로 오늘날 새로운 전장이며 베를린 장벽인 셈이다.
자신의 존재를 불편해하는 사회를 향해 헤드윅이 '침 뱉고 경멸하고 무너뜨려 보라'라고 도발하면서 극은 시작된다.
그러나 콘크리트 장벽과 달리 헤드윅은 자기 욕망을 가진 인간이다.
자신이 발디딘 사회에서 성원권을 획득하지 못해 절망하고 경계의 존재로서 외로움을 느끼며 그럴수록 ‘정상’사회로 편입되고자 하는 욕망도 강하게 느낀다.
두 번째 넘버 'Origin Of Love'를 시작하기 전, 헤드윅은 한 침대에서 자던 엄마와 자신이 마치 잘못 맞춰진 퍼즐 같았다고 말한다.
비단 엄마와의 관계뿐 아니라 세상과의 관계도, 연인이나 다른 인간관계도 내내 어긋난 퍼즐 조각 같다.... 고 헤드윅은 생각했던 듯하다.
세상과 어울려 이질감 없이 하나의 풍경으로 녹아들고 싶었던 그는 옛날 옛적 신화의 시대에 잃어버린 반쪽을 열망하게 됐을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결여된 무엇을 채워준 반쪽, 그를 찾아 완벽한 하나가 된다면 세상에 딱 맞는 퍼즐 조각이 될 수 있을까.
절대적인 신조차 두려워했던 완결성을 얻게 될까.
이러한 낭만적 기대는 역설적으로 ‘지금 나는 절대적으로 결핍된 존재다.’로 이어진다.
그래서 헤드윅의 고군분투는 시작된다.
자유의 나라 미국으로 데려다 줄 남자를 만나 (Sugar Daddy) 그 조건에 맞추기 위해 성전환 수술을 받고(Angry Inch), 새롭게 획득한(또는 여전히 부족한) 정체성에 맞춰 가발을 쓰기도 하고 (Wig In A Box).
세상에 편입되고자 그는 스스로를 깎고 자르고 구부린다.
But i swear by your expression
That the pain down in your soul was the same
As the one down in mine
그 영영 끝나지 않을 발버둥을 따라가다 보면 쓸쓸함이 객석으로 밀려든다.
아마 나도 아는 감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무치는 외로움의 정서, 그게 내가 만난 헤드윅이었다.
생각해보면 많은 사람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어느 정도는 다들 세상에 잘 어우러지도록 사회가 용인하는 정상성을 흉내 내며 살고 있다.
게다가 우리도 어느 측면(성별, 성적 지향, 지역, 국적, 학력, 재산 규모 등등)에서는 세상의 소수자이자 약자로 억압받는 정체성을 갖고 있기도 하니까.
그래서 헤드윅의 이야기가 무척 특수하게 보이지만 결국 보편적인 위로로 지금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극의 말미에서 던지는 메시지,
'남자도 여자도 아닌 그보다 특별한 존재인 너'
'너는 그 자체로 완전하다'
'지지 마라, 포기 마라'
이러한 메시지는 헤드윅-토미 그리고 헤드윅-이츠학의 관계를 통해 증폭된다.
아니 개별 관계라기 보단 토미-헤드윅-이츠학 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있는데 이게 영화가 아니라 무대 예술이기에 더 직관적으로 와닿는 지점이 있다.
(*약한 스포(?): 헤드윅은 밴드를 제외하면 두 명의 배우만 무대에 오른다)
그 이야기도 주절주절 늘어놓고 싶지만 너무 길고 (*오랜만에 후기 쓰다가 지침) 스포일러라 생략.
SNS와 방송 자막에도 올라오는 트랜스젠더 혐오 밈Meme, 여성의 안전과 난민의 인권을 대척점에 놓고 경합시키던 흐름들, 자꾸 지워지는 이주노동자의 존재, 그리고 이어지던 죽음들까지... 그 모든 이슈를 곱씹다 보면 뮤지컬 [헤드윅]이 우리나라에서 이토록 오래 흥행하는 것이 참 기이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뉴스 댓글창에서, 게시판에서, SNS에서, 또 일상에서 흔하게 마주치는 혐오 정서는 이 극이 상연되는 극장 안에는 존재하지 않을까.
무대 위와 객석... 정말 이 많은 사람들이 현실 세계에서 우리 곁의 헤드윅을 응원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 의심과 회의감이 극을 보는 내내 밀려들었다.
물론 공연, 예술이 뭐 대중을 교화하고 인도하고 어쩌고 그런 소리를 하려는 게 아니다. 극 하나 본다고 사람이 바뀌는 건 역시 보편적인 경험일 리 없고. 이건 뮤지컬이지 도덕책도 경전도 아니지 않나.
하지만 역시, 실제 현실에서 자신이 이해하지도 못하고 그럴 노력도 하지 않으며 심지어 배척하는 그 정체성을 예술로, 유희로 즐긴다는 건 좀... 비윤리적이지 않나, 싶은 것이다.
헤드윅은 사회의 정상성을 흉내 내는 것을 그만두고 오직 나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하며 벽을 넘어갔다.
하지만 그 벽 너머에서 만나게 될 사람들, 바로 우리는 과연 어떤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