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에서 최근 논의되고 있는 여러 법안을 어떻게 다뤄볼 수 있을까 이야기하다가, 문득 나는 법이 너무 피로하다고 했다. 법에 관한 이야기를 콘텐츠로 - 특히 영상으로 - 다룬다는 것 자체가 어렵다는 뜻이기도 했지만, 그냥 이 '법'이라는 걸 둘러싸고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피로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언론에서, SNS에서 자꾸 오르내리는 법안들의 이름을 본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아동학대 방지법, 차별금지법, 그리고 누군가의 이름이 떡하니 박힌 누구누구 법, 또 다른 누구누구 법.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위해 지난해 연말부터 국회 앞에서 단식농성을 하고 있는 유족의 이야기를 들었다. 또 최근에는 아동학대 사망 사건이 널리 알려지자, 대체 언제 조사하고 준비했는지 국회에 관련 법안이 11건이나 올라왔다는 이야기도 접했다.
두 이야기 사이에서 아득한 거리감을 느낀다. 이미 누군가 목숨을 잃었는데 그 옆에 남은 누군가가 또 목숨을 걸면서까지 만들어달라고 하는 이 법과, 여론이 크게 한 번 호응하자마자 앞다투어 쏟아내는 저 법 사이에는 대체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그래서 이 법이 생기면 뭐가 어떻게 달라질까? 아니 달라지긴 할까?'라고 종종 생각한다. 법 자체에는 아무런 감정도, 생명력도 없다. 그 법이 유효할 수 있도록 힘을 부여하는 건, 결국 법이 규정하고 있는 내용을 현장에서 취지에 맞게 해석하고 집행하는 이들의 몫이다. 그러면 그 몫을 다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아동학대 방지를 위해 새로 발의된 법안에는 형량을 강화하고, 학대 신고가 2회 이상 접수되면 피해 아동을 가정에서 즉시 분리하도록 하는 내용이 담겼다고 한다. 이거면 될까. 이 법이 생기면 아동학대를 줄일 수 있을까. 인터넷에는 '이미 있던' 조치 매뉴얼에 따라 학대 피해가 의심되는 아동을 가정에서 분리시켰는데도, 갖은 소송에 시달리고 조직 내부에서는 징계까지 받았다는 현직 경찰관의 이야기가 돌았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에는 기업이 중대한 사고를 냈을 때 대표이사와 경영자를 비롯한 책임자에게 명확하게 책임을 묻고 처벌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기존에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제정된 산업안전보건법을 보완해, 처벌의 강도와 범위를 높였다. 이거면 될까. 이 정도의 법안이면 충분할까.
'이미 있던' 저 산업안전보건법이 진작 작동했다면, 심지어 사람이 죽은 뒤 2018년 전면 개정까지 했던 그 법이 생명력을 갖고 제대로 집행되었다면, 그래서 실질적인 책임자가 미꾸라지처럼 법망을 빠져나가는 모습이 반복되지 않았다면. 그러면 지금까지 법안을 가지고 싸우는 동안 일하다 죽는 사람은 줄었을지도 모른다. 국회 앞에서 유족이 곡기를 끊고 농성하는 모습은 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미 있는 규칙과 법조차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곳에서, 자꾸만 새 법을 찾으려는 모습에 지친다. 장난감 태엽을 다 감지도 않고서는 '고장 나서 멈췄으니까 새로 사야겠다'며 바로 내버리는 것 같은 모습에 숨이 막힌다. 입법을 외치기 전에 기존의 법을 현장에서 집행할 때에는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그 실질적인 문제를 개선할 수는 없을지 먼저 고민하는 건 어려울까.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어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를 통과했다. 하지만 5인 미만의 사업장은 처벌 대상에서 제외되었고, 50인 미만 사업장에는 3년의 유예기간을 적용하기로 했다. 이외에도 최초 발의된 내용에서 많은 요소들이 빠졌다. 여야의 이런 합의에 산업재해 유족들과 함께 농성에도 참여했던 정의당은 '오히려 법안이 후퇴했다'며 반발하고 있다고 한다. 목숨을 걸고 씨름해왔던 법안이 결국 누더기가 되어 본회의로 올라간다. 이 모습 역시도, 힘이 빠진다.
모든 법이 이렇지 않다는 걸 안다. 처음부터 완벽한 법이 없다는 것도, 그리고 일상의 크고 작은 행위를 규정하는 법을 발의하고 제정하는 것이 변화의 시작점이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내게는 최근 입법을 둘러싼 - 특히 정치권에서 - 이야기에 대한 피로감이 무척 심했다. 이런 생각은 정치혐오에 가까운 걸까? 어쩌면 타협의 예술이라고들 하는 정치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