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의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
사랑하는 사람을 '내꺼'라고 부르는 순간, 관계의 불행이 시작된다. 그가 내 생각대로 움직여주길 바라고, 내가 원하는대로 느껴주길 바라고, 내가 하기 싫어하는 행동을 안 해주길 바라고, 나와 비슷한 세계를 가지길 바라고, 바라고, 바라고, 바라고…. '내꺼'라는 소유 관념에는 한 명의 인간을 일그러뜨린다. 즉, '타자'로서의 사람의 자리를 없애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나와 비슷해지기를, '나의 것'이 되기를 바라는 인간의 욕심을 어찌한단 말인가.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 온전히 사람 대 사람으로 공존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하단 말인가.
당신은 영원히 내가 '모르는 사람'
화가인 영수(김주혁)는 민정(이유영)은 연인 사이다. 하지만 민정이 매력적인 여자이기에, 주변에 남자가 끊이지 않고, 스스로도 그런 남자들을 거부하지 않으면서 살아간다. 영수는 민정의 '자유로운' 태도에 '술을 먹지 말라'는 약속으로 제동을 걸어보려 하지만, 욕을 하며 자신을 구속하려는 영수를 견딜 수 없는 민정은 영수 곁을 떠난다. 민정을 잊지 못한 영수는 민정을 다시 찾아가지만, 민정은 영수를 모르는 사람처럼 대한다. 영수는 처음에 민정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하다가, 영수 역시도 민정을 모르던 사람처럼 대하면서, 둘은 새로운 사람을 만난 것처럼 존댓말을 하며, 새로운 관계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민정이 만나는 남자들-재영(권해효), 상원(유준상)-은 모두 민정을 '아는 사람'이라며 접근을 한다. 하지만 민정은 재영에게 스스로를 민정과 '쌍둥이'라고, 상원에게는 '당신이 아는 그 사람과 다른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그들이 '알던' 민정은 '과거의' 혹은 '그때 그 순간의' 민정으로 이미 사라진 사람이기 때문일 수도, 그들이 '안다'고 생각하는 민정은 민정 그 자체가 아니라, '그들이 알고 있는' 민정에 불과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결국 민정은 '아는 사람'은 영화 속에서 아무도 등장하지 않는다. 민정은 모두에게 '모르는 사람', 즉 '영원한 타자'로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민정이 끊임 없이 거부하는 것은 단순히 윤리나 도덕, 상대와의 약속이 아니라, 민정 자신이 '민정 자신(Myself)'에서 '당신의 것(Yours)'으로 떨어져버리는 상황이다. 민정은 관계 유지를 위해 끊임 없이 상대에게 맞추거나, 상대가 맞춰주길 기대하는 것에서 자유로워지려 한다. '사랑'이라는 관계 속에서 '타자'가 아니면 스스로 존재할 수 없고, 그저 소유될 뿐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리라. 사랑은 영원히 '모르는 사람'이어야 하고, 영원히 '타자'여야 가능한 관계 양상인 것이다.
모르기 때문에 사랑하고, 모르기 때문에 구원 받는다
사랑에 있어 '타자'에 대한 담론을 다룬 텍스트는 한병철의 「에로스의 종말」도 있다. 한병철은 '에로스'를 "강한 의미의 타자, 즉 나의 지배 영역에 포섭되지 않는 타자를 향한 것"으로 정의했다. (반대로 에로스가 아닌 것은 '동일자'에 의한 것이거나 '나르시시즘'에 의한 것으로 정의한다.) 그는 타자로부터 구원 받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에로스는 타자를 타자로 경험할 수 있게 하고, 이로써 주체를 나르시시즘의 지옥에서 해방시킨다. 에로스를 통해 자발적인 자기 부정, 자기 비움의 과정이 시작된다. 사랑의 주체는 특별한 약화의 과정 속에 붙들리지만, 이러한 약화에는 강하다는 감정이 수반된다. 물론 이 감정은 주체 자신의 업적이 아니라 타자의 선물이다.1"
영수가 민정과 헤어지는 과정(모든 연인이 서로에게 환멸을 느끼고 헤어지는 과정)이 '자가증식', '자기동일시', '나르시시즘의 확장'의 실패 과정-이 과정은 언제나 실패하기 마련이다-이라면, 다시 만나는 과정은 '타자의 회복'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영수는 민정을 '자신의 것(Mine)'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는 다른 사람, 그가 모르는 사람, '타자(Yourself)'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결국 영수는 타자와의 사랑을 통해 "세상을 타자의 시선으로 새롭게 창조하고 익숙한 것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2" 그것은 영화 속 영수에게는 '새벽에 자다 깨서 수박을 받아 먹기'의 이미지로 그려진다. 그 순간이 영수가 민정에게 구원 받는 순간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타자여야 한다
한병철은 에로스적 사랑을 일종의 실패로 규정한다. "타자와의 성공적인 관계는 일종의 실패로 여겨진다. … 만약 우리가 에로스의 묘사에 사용되는 용어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래서 에로스적인 것을 '붙잡다' '가지다' '알다'와 같은 말로 규정하려 한다면 … 에로스는 그 모든 것의 실패다. 우리가 타자를 소유하고 붙잡고 알 수 있다면, 그는 더 이상 타자가 아닐 것이다. 3"
사랑이 구원이려면,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타자여야 한다. 너무도 다르게 태어나고, 너무도 다르게 성장하고, 너무도 다르게 생각하고, 너무도 다르게 느끼는 사람들이, 서로 '사랑한다'는 이유로 같아지기를 바라고, 나의 욕망대로 움직여주기를 바라는 것은 상대를 존재가 아닌 소유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홍상수는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에서 이렇게 말하고 싶지 않았을까.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타자여야 한다고, 우리는 어차피 모두 모르는 사람들일 뿐이라고. 안다고 착각하지도, 알기에 속박하려고 하지 말고, 서로의 존재를 긍정하라고. 어차피 사랑의 관계에서 당신자신(Yourself)은 있어도 당신의 것(Yours)는 없다고.
2017.03.06.
*본문 인용
1. 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문학과지성사(2015), p.20-21
2. 한병철, 「타자의 추방」, 문학과지성사(2016), p.107
3. 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문학과지성사(2015), p.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