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산업이 '존엄'을 회복하기 위해 해야 할 일들
에드워드 호퍼 <재봉틀 앞에 앉은 여인> 1921년작, 캔버스에 유채, 티센 보르미자 미술관, 스페인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앞에서
미국의 화가 에드워드 호퍼는 사실주의에 입각해 그림을 그렸습니다. 수년간 잡지사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일을 했던 그가 1921년 그린 <재봉틀 앞에 앉아있는 여인>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 긴 머리칼을 한 묘령의 여인이 있습니다. 금빛이 도는 아침햇살을 머금으며 토해내는 아도비 빛깔의 벽을 배경으로, 4개의 분면으로 나뉜 직각형 창문 아래 여인은 지금 재봉틀 작업에 빠져있습니다. 매우 기하학적인 선이 돋보이는 그림이에요. 호퍼의 단순하지만 객관적으로 담아낸 강력한 이미지에는 그의 따스함이 조금씩 배어납니다. 미술사가 로이드 굿 리치가 그의 그림을 향해 '새로운 종류의 객관성'이라고 말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에요. 국제적 영향력이나 트렌드를 따르기보다 미국적 삶에 뿌리를 두고 주변부의 일상을 순수하게 묘사하려고 했던 그의 노력이 빛을 발한 거죠.
옷을 수선한다는 것은
저는 옷을 만드는 기술, 재단에 관심이 많습니다. 가장 큰 동기는 르네상스 시대에 발행된 남성복 재단법을 설명한 매뉴얼을 읽으면서부터였어요. 덩달아 의류 수선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것도 박물관에서 이뤄지는 전통의상의 복원 과정에 푹 빠지면서부터입니다. 한 조각의 천까지 모두 수거해 과거 자료에 근거해 하나씩 정교하게 한 벌의 옷을 조립해가는 과정은 놀라웠어요. 이렇게 복원된 한 벌의 옷은 과거를 읽는 렌즈가 되어 지나간 시대에 관한 우리의 선입견을 깨트리고, 새로운 관점에서 지나간 시간을 읽을 수 있게 해 줍니다. 서구와 동양 모두 기성복이 태어나기 전, 사람들은 자신이 직물을 구매한 후, 의복을 짓거나 기술자에게 디자인 사항을 설명해가며 만들어 입었습니다. 옷을 꾸미는데 소요되는 장식과 트리밍을 더할 경우 제작에 수개월이 걸렸기에, 옷을 수선하는 데도 많은 품과 비용을 들였지요.
온라인 의류 쇼핑몰 잘란도의 <Save your Wardrobe>
의류수선이 뜬다, 패션의 새로운 미래
최근 옷장에 묵혀둔 옷들을 되살리고, 낡은 핸드백을 고쳐주는 다양한 기술 플랫폼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습니다. 볼품없는 의류 수선과 리모델링 사업이 소비자들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지속가능성 화두의 대두, 의류 폐기물량의 국가적 규제, 의류 렌털 및 재판매 시장의 성장과 함께 의류 보관이 중요해져서인데요. 의류 수선 관련 플랫폼 중 영국을 기반으로 지역의 재단사와 사용자를 연결시켜 주는 소요(Sojo)와 의류 관리 애플리케이션인 세이브 유어 워드로브(Save Your Wardrobe), 명품 의류 수선 플랫폼인 리커버리(Rocovery) 같은 기업들은 각각 수백만 달러의 투자를 유치한 상태입니다. 의류 수선 및 재단 플랫폼인 더 심(The Seam)은 영국 내 2500명 이상의 특화된 분야별 기술을 가진 장인 네트워크를 구축해 지금까지 1만 건 이상의 수리 및 리모델링을 했고, 2020년 창업 이래 고객도 20%가 늘었습니다. 소비자들은 55파운드의 비용으로 재단사와 예약을 하고 1년에 4번, 옷의 장식용 자수 및 재단을 통해 맞춤형 비스포크 서비스를 만날 수 있지요.
앞서 언급한 ‘세이브 유어 워드로브’는 독일의 온라인 소매업체인 잘란도(Zalando)와 장기계약을 맺었습니다. 수익성을 위해 정평 있는 브랜드, 소매업체와 파트너십을 맺는 것도 현재의 의류 수선 시장을 확대하는 전략입니다. ‘세이브 유어 워드로브’는 2023년까지 잘란도에서 팔린 5천만 점 이상 의류 품목의 수명을 확장할 생각이라고 합니다.
현재의 의류산업은 넘쳐나는 반품과 의류폐기물 처리비용으로 골머리가 아플 지경입니다. 패션산업의 지속가능성 의제를 밀어붙이려면, 먼저 의류 품목 자체의 내구성과 사용빈도 및 기간을 늘리는 것이 관건이지만 의류수선 분야가 매력적인 산업이 되기에는 넘어야 할 산이 많습니다. 지역의 능력 있는 재단사와 각 품목 별 전문가를 플랫폼과 연결시키는 문제도 꽤 도전적인 일입니다. 기술을 가진 장인들이 시장에 공급되는 량이 줄고 있고요. 신규 진입은 여전히 적기 때문입니다.
안나 앙커 <바느질을 하는 어부의 아내> 1890년, 캔버스에 유채, 랜더스 뮤지엄 소장
그럼에도 의류 상품 자체의 내구성을 확장하기 위해, 많은 패션기업이 의류수선 분야에 투자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패션의 지속가능성 및 탄소 중립을 향한 노력은 소비자의 인식 변화와 맞물려있는데요. 디자이너 발렌시아가는 자신의 옷을 여인 3대에 걸쳐 입을 수 있어야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옷을 오래 입는다는 것만큼 브랜드의 내재가치를 높일 수 있는 전략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사실 패션에서 내구성 Durability 이란 중요한 가치였습니다.
오늘 소개하는 두 번째 그림을 볼까요? 덴마크의 인상주의 화가 안나 앙커의 그림입니다. 어부인 남편의 옷을 수선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옷을 수선해서 입는 습관 혹은 태도 자체를 버렸습니다. 패스트 패션의 창궐 속에서, 옷은 점점 약하게 만들어졌고 한 시즌을 겨우 버텼을 뿐인데 사실 옷의 물성 자체가 약해졌죠. 단추를 다시 달 일도, 밑단을 접어 다시 봉제할 일도 없어진 사회. 옷의 생산은 지수적으로 증가하는 동안, 그만큼 늘어난 물질 문화인 패션의 한 측면을 잃어버렸습니다.
패션산업을 비롯해, 현대의 모든 기업이 지속가능성 의제를 이야기합니다. 생산이력제를 통해 더욱 투명한 유기농 소재로 만들어진 옷을 만들고, 친환경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의류 생산과정에서 동물을 학대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죠. 이외에도 환경영향을 줄이기 위한 다양한 과학 및 테크놀로지 투자에 패션산업은 힘을 모으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법도 배워야 했어요. 지속 가능한 공급 모델로 변화하기 위해 바로 이 사고를 내면화시키는 사회적 프로그램이 필요합니다. 수선을 뜻하는 리페어(Repair)에는 ‘회복’의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16세기 이 단어는 '다친 곳을 치료하고, 보상하기 위해 그만큼의 선을 행하는 것'이란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지금 이 순간, 패션산업은 패스트 패션의 병리적 결과를 치유하고, ‘패션의 존엄’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우리에겐 ‘수선업’의 복원이 필요합니다.
*오늘 포스팅은 <어패럴 뉴스>의 김홍기의 패션 인문학에 발표한 글을 더욱 확장해서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