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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글리 Apr 16. 2019

폐허가 되어버린 관계 속 부재, 러브리스

사랑이 사라진 자리에 남겨진 건 빈집이 아닌 폐허였다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이가 사라졌다.

사랑이 사라졌다.


아이의 '부재'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어질러진 아이의 방, 전과 다를 바 없이 서로에게 냉랭한 부부의 말투, 창밖으로 비치는 언제나 그랬듯 황폐하게 펼쳐져있는 공터의 풍경에서 감지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변화였다. 어쩌면 누구에게도 실감되지 않는, 아직은 전혀 와 닿지 않는 아주 작은 변화일지도 모른다.


아이는 사라졌고 부부는 그 날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부부는 아이가 사라졌다는 걸 하루가 꼬박 지나고 나서야 알아차렸다. 아이는 이틀간 학교를 나가지 않았다. 학교에서 연락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부부는 아이가 없어졌다는 걸, 그 부재를 더 오랫동안 알아차리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이미 폐허가 되어버린 가족 안에서 그 작은 존재는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을 오롯이 혼자,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곧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더 이상 사랑이 남아있지 않은 관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각자의 피난처를 마련하고 있었던 남자와 여자. 남자는 어린 여자를 만나 새로운 아이를 가졌고 여자는 나이 많고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남자의 보살핌을 받으며 이를 다른 이들에게 뽐낸다. 그러나 그 사이에 남겨진 아이에게는 피난처가 없다. 사랑이 사라진 일상 속에 무너지는 관계, 그 파괴된 공간 속에 아이는 피할 곳 없이 떨어지는 모든 잔해를 그대로 받아내고 있었다. 그들 사랑의 오직 하나 남은 증명인 아이는 그들의 사랑이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버렸듯이, 그것과 똑같이 사라져 버린다.



여자는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나는 그 남자를 사랑한 적이 없어."

여자가 부정하는 과거의 사랑의 감정은 그녀 자신 이외에 그 누구도 확인할 수 없는 것이기에 누구에게도 긍정도 부정도 되지 않은 채 그저 '사랑하지 않았던' 채로 남아있다.


그러나 아이는 다르다. 아이는 그들의 눈 앞에 실존하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럼에도 아이 또한 끊임없이 부정당하고 있다. 그것은 감정의 부재를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과는 다르지만 같은 방식으로 부정당하고 있다. 눈 앞에 앉아 밥을 먹는 아이에게 눈 한 번 마주치지 않고 핸드폰만 보고 있는 엄마의 모습, 방 안에서 울고 있는 있는 아이를 괘념치 않고 누가 아이를 키울 것인지에 대해 이를 악물고 떠들어대는 부부, 그 안에서 아이의 존재는 내팽개쳐져 있고 끊임없이 부정당하고 있다.


아이를 낳지 말았어야 했다고 말하는 엄마. 태어나지 않았어야 하는 아이의 마음에 무엇이 남아있을까. 그녀는 아이가 없어지고 나서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고 말하지만 사랑이 떠난 자리에 처치 곤란한 유물처럼 남아있던 아이에게는 견뎌내는 매일이, 힘겹게 걷는 자리마다 폐허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누구나 어떠한 감정을, 관계를 부정할 때가 있다. 난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아, 사실 한 번도 좋아한 적이 없어, 지금까지 친구로 남아있던 건 그저...... 이런 말들로 함께 한 시간과 공유한 감정을 부정하면서 우리가 얻으려고 하는 건 무엇일까. 어떤 사람들은 공을 들여 감정을 쌓아 올리는 것만큼 그것을 무너뜨리고 치워버리는데 더 많은 시간을 쏟는다. 그리고 깨닫는다. 그럼에도 그것들은 결코 완전히 치워버릴 수 없는 것들이라는 것을.


사랑이 그저 '부재'하는 상태, Loveless로 남는다면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랑이 존재하다 없어진 자리에 남는 것은 '빈집'이 아닌 '폐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깨끗한 빈 집이 아닌 여기저기 부서지고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알 수 없게 남겨진 물건들이 나뒹구는, 때로 이런 폐허를 깨끗이 청소하는 방법은 없다.



사랑이 떠난 자리에 남겨진, 폐허가 되어버린 모든 것

남자와 여자, 이제는 서로를 미워하는 두 사람 각자의 일상 속에 아이의 존재는 없다. 그들은 아이에게 전화 한 번, 문자 한 번 하지 않는다. 아이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모른 체 그들은 그들의 새로운 파트너와 사랑을 속삭이고, 또 사랑을 나눈다. 그중 정작 가장 사랑받아야 하는 아이에게 부재한 사랑이 그곳에 있다. 남녀 일상을 좇는 카메라 렌즈 속에는 모든 것이 가득 차있다. 가득 차 어깨가 부딪히는 엘리베이터 안, 북적이는 카페테리아, 예약이 꽉 차 정신없는 미용실.


이에 반해 아이의 흔적을 찾아 헤매는 모든 공간들은 일종의 폐허다. 황폐하고 어두운 숲, 모든 것들이 조각조각 부서져 흩어져있는 폐건물, 아이들이 떠나고 조용하다 못해 스산한 학교. 이러한 '있음'과 '없음'의 대조는 끊임없이 아이가 사라진 공간과 시간 속에 부재된 것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한다. 그리고 스크린 밖에서 우리가 살아내는 하루, 일상 속에 부재된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대신해 채워지는 것들은 무엇인지 우리에게 질문한다. 사랑이 사라진 폐허 속에 서있는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 말이다.


 

이제는 익숙해진, 사랑이 사라진 폐허와 같은 세상

영화는 반복적으로 황폐한 공간을 천천히 비춘다. 그리고 황폐해진 인물들의 삶을 다시 비춘다. 새로운 관계를 시작한 이제는 부부가 아닌 두 남녀 각자의 삶은 그다지 새롭지 않다. 남자는 새로 태어난 아이를 집어던지다시피 해서 요람에 집어넣고 여자는 눈이 오는 야외에서 조깅 대신 러닝머신을 뛰고 있다. 둘의 얼굴은 공허하고 피폐하다. 그러나 그런 그들의 표정 없는 얼굴이 아이를 잃은 데서 오는 것인지, 항상 그러했듯이 또다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끊임없이 사랑 없는 공간에 남겨진 것들에 대해 은유한다. 아이가 사라진, 사랑이 떠난 자리에서 고개를 들어 내 옆의 사람을 바라보기보다 작은 스크린으로 가짜 세상을 보는 사람이 있고 사랑은 무슨, 셀카나 찍자고 웃어대는 여자들이 있다. 당장 내 곁에서 일어나는 일상보다 티비 화면으로 멍하니 남의 불행을 관람하는 것이 더 나은 사람들이 있다. 폐허가 된 공간보다 더 씁쓸한 것이 있다면 폐허가 되어버린 마음과 관계가 아닐까.


러시아라는 영화적 배경이 영화를 더 어둡고 쓸쓸하게 만들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사는 어느 곳이든 그 상황이 크게 다르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아무리 밝고 환한 햇살이 비춘다 해도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지 않는다면, 내 앞에 놓인 현실보다 화면 속 세상에 더 의존하고 있다면, 모든 걸 가볍게 소비해버리고 뒤돌아보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사랑을 믿지 않는다면.

 


*브런치 무비패스를 통해 해당 영화를 관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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