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글리 Jun 03. 2019

다시 하고 또 해야만 하는 이야기

두렵고 불편하지만, 자꾸만 얘기해보려고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작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


어느 순간부터 친구들과 나누지 않는 몇 가지 종류의 이야기들이 있다. 정치적 성향, 사회 문제에 대한 개인적인 의견, 그리고 내가 옳다고 굳건히 믿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 어느 순간부턴가 상대가 불편함을 느낄까봐, 토론하는 것에 피로감을 느껴서, 내가 옳다는 것을 강요하고 싶지 않아서... 여러 가지 이유로 모두가 편안하게 느낄 이야기만 하기 시작했다.


얼마 전, 친구와 여행하는 중에 학벌주의에 대해 토론했다. 술기운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토론은 꽤 길어졌고 의견도 팽팽하게 갈렸다. 누가 옳다 그르다 결론 낼 수 없는 토론이었다. 다음 날 생각해보니 친구와 이런 이야기를 나누어본 게 언제인가 싶었다. 어쩌면 서로 의견이 다르거나 누군가는 정말로 틀린 이야기를 할지라도, 일단 이야기를 시작하지 않으면 그것조차 알 수가 없다. 우리가 같은 문제에 대해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 수도 없고, 틀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의 잘못을 고쳐줄 수도 없다.



"옳고 그름을 말하기 어려운 시대인 것 같아"


한때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거지"라는 말이 참 멋지다고 생각했다. 나 또한 나와 '다른' 사람을 인정하고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고 비난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살아야겠다 다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은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누군가가 '틀리다고 비난'하는 것과 정말로 '옳지 않은' 말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 그것은 그르다고 알려주는 것, 이 둘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임에도 때때로 같은 것으로 인식된다.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말이나 행동, 타인이나 특정 그룹을 소외시키거나 차별하는 말과 행동을 보고도 '내 생각이랑 달라서 그런 거지 뭐'라고 넘어가야 할까?


술을 마시던 중 친구가 내게 말했다.

"옳고 그름을 말하기 참 어려운 시대인 것 같아.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사람을 보고도 '너 그러면 안된다. 그건 정말 잘못된 거야'라고 말하기 어려워. 그랬다가 괜히 '너랑 생각이 다르다고 그렇게 비난하면 안 되지' 그럴 것 같단 말이지. 그렇게 이야기를 하다 보면 정말 이건 그냥 서로 생각이 다른 건데 내가 오버한건가 싶고 말이야. 근데 사실 집에 와서 다시 냉정히 생각해보면 그건 그 사람이 정말 옳지 않은 말을 한 거거든."


친구 말에 공감하면서 한편으로 생각한다. 친구가 그 사람에게 '그러면 안된다. 그건 정말 잘못된 거야.'라고 이야기를 꺼내는 것만으로 어떠한 의미가 있지 않을까. 그 사람 또한 친구처럼 집에 가서 그 대화를 복기해보지는 않을까 (물론 전혀 그런 생각 안하고 편히 자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알지만). 순간의 불편함이 싫어 아무 말 없이 지나간다면 아주 작은 변화조차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는 그 사람은 자신의 의견에 친구가 암묵적으로 동의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옳고 그름을 말하기 어려운 시대'에서 그래도 이것이 '옳은지 그른지' 이야기해보자고 말을 꺼내는 사람이 있어야 이 사회가 후퇴하지 않고 나아가는 것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옳지 않은 것을 확신하는 사람과 진실의 실체에 대한 이야기


“혹시 사진 속 인물을 보신 적 있으신가요?”


같이 활동했지만 이름은 모르죠”,

“보긴 봤는데 어떤 분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모자를 써서 학생 같기도 하고”,

“학생이 낼 수 있는 포즈도 아니고”


1980년 광주,

누군가는 그와 같은 차를 타기도 했고, 누군가는 그에게 밥을 해주기도 했다. 또 누군가는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의 죽음과 마지막을 목도했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의 이름이나 그의 정체를 확신하지 못한다. 그런데 확신에 찬 목소리로 그를 안다고 말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를 만난 적도, 이야기를 나눈 적도, 함께 그 현장에 있지도 않았지만 누구보다 확신에 찬 그 목소리,

“이거는 틀림없이 북한군이다” “제1광수다


어딘가 틀어진 확신과 집념에서 시작되는 다큐멘터리 '김군'은 사건이 아닌 개인의 서사와 역사로 5.18을 풀어나간다. 이 영화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록사진에 찍힌 시민군들을 북한특수군 한 사람 한 사람과 대조하는 군사평론가 지만원의 기발한 역사 고증 방식에 질문을 던지는 동시에 그 방식을 그대로 차용하여 사진 속 시민군 개개인을 추적, 그들 개인의 이야기를 듣는다. 영화 도입부에서 지만원 씨의 기발한 발상에 경악하거나 흥미를 가지며 영화에 서서히 빠져들다 지만원이 제1광수로 지목한 강렬한 사진 속 '김군'을 추적하며 만나게 되는 시민군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에 공감하게 된다. 결국 하나의 '사건'으로서의 광주민주화운동뿐 아니라 개개인 인생의 한 지점으로서의 광주민주화운동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감독의 영화 구성과 연출은 탁월했고, 영화에 빠져드는 데에 가장 큰 몫을 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학창시절 근현대사 수업을 들었을 때를 제외하고는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어본 적이 없다. 근현대사 공부를 하면서도 사건의 연도와 배경을 외우는 식이었지, 그러한 일이 시민군, 군인, 혹은 광주시민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생각해볼 계기도, 여유도 없었다. 나뿐 아니라 광주민주화운동, 제주 4.3 사건, 전남 여순사건 등 자신이 겪어보지 않은 역사적 사건들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결정하려면 그 사건에 대해 잘 알아야 할뿐더러 좀 더 다각적으로 생각하는 힘을 길러야 할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런 사건들에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데에는 용기 필요하다. 이야기를 꺼내는 데에 두려움과 불편함이 있겠지만 그렇게 계속 외면하기에 이 모든 사건들은 우리 사회의 근간을 흔들 만큼의 영향력이 있었고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를 만든 주요한 지점들이었음에 분명하니 말이다.



"5월 이야기는 그만하자"


영화에서 광주민주화운동의 시민군이었던 한 사람이 친구에게 "5월 이야기는 그만하자"라고 말하는 부분이 나온다. 그에게 5월 이야기는 분명 떠올리기 힘든 고통이고 슬픔일 것이다. 그는 그런 고통과 슬픔을 안고 살아가고, 그것을 잊고자 그 이야기를 묻어두려 한다. 그러나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이야기한다. 우리는 5월의 이야기를 해야만 한다고. 5월의 고통을 안고 사는 사람들은 그 진실을 알려주고자 이야기해야 하고, 5월의 고통을 모르는 우리는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그들의 고통과 슬픔에 공감하기 위해, 우리 사회와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 5월의 이야기를 꺼내야 한다고. 우리 사회는 그 불편한 이야기가 더 이상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으며 누구에게나 하나의 진실로서 접근할 수 있는 것이 되게 하기 위해 자꾸만 이야기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방식은 다양할 것이고, 그 방식에 대해 모두가 끊임없이 고민해야겠지만, 어떤 식으로든 우리는 그 이야기를 자꾸만 꺼내야 한다. 그래야 지만원의 말도 안 되는 거짓 주장에 현혹되는 사람이 기세 등등하게 '그릇된' 이야기를 퍼뜨리는 일도 없을 것이고, 5월 광주의 고통과 슬픔에 공감하는 사람들도 많아질 것이다. 우리 사회가 조금 더 옳은 방향으로 가기 위해, 고통의 역사를 딛고 나아가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어야만 한다.

작가의 이전글 두 명의 돈키호테를 만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