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진 다음에야 열매가 맺힌다. 찬란한 시절이 다 지나야 진정으로 남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래서 가끔 삶이 힘겨울 때, 열매를 앞두고 있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열매가 진정 중요해 보여도 꽃의 화려함을 속된 것인 양 폄훼하여 꽃의 시절을 맞지 못한 힘겨운 오늘을 살아갈 위안으로 삼을 수는 없다는 것을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꽃이 한창일 때, 냉기를 맞으면 제대로 된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이다. 꽃의 아름다움은 한 시점을 상징하는 것만이 아니라 모든 계절의 완결된 서사를 잇는 전체의 표현 같은 것인 것이다. 열매를 기다리며 위안 삼을 수 없는 까닭이다.
오늘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본다. 꽃을 피우지 못했다면, 아직 가지가 말라비틀어지지 않은 동안에는 꽃을 피울 일이 남는다. 그래서 지금 내가 마주하고 있는 이 시간은 꽃잎을 틔우려고 갖은 애를 쓰는 중에 냉기를 맞고 있는 시간이 되는 것이다. 예정된 것이라 믿었던 이야기들이 뚝뚝 끊기더니 가능성마저 생각하지 않던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열매를 맺을 수 있을지 걱정할 수조차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는 것만 같다. 냉기를 끌어오는 온갖 것들을 무엇 하나 피하지 못하고 있다. 애를 써봐도 티가 나지 않는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하게 된다. 열매의 순간일지도 모른다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으려는 노력이 쓸모가 없어진다.
그러나 아직 꽃조차 다 피우지 못하였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는다. 이 시간을 살아내야 하고 살아낼 수 있는 것이라면, 아직 기회는 남은 것이기 때문이다. 가지가 말라 더 이상 다음을 기약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면 성장의 서사는 마침표를 스스로 찍지 않는 이상 여전히 진행 중인 것이다.
그래서 냉기에 꽃잎이 더 이상 상하지 않도록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찾는다. 잎과 봉우리에 빛이 더 많이 들게 하기 위해서 주변의 잡초를 뽑는다. 마른 공기에 냉기가 더 날카로워지지 않도록, 그리고 땅이 마르지 않게 하기 위해서 물을 곱게 뿌린다. 또 주변에 불을 떼 냉기가 처참한 지경으로 꽃봉오리를 괴롭히지 않게 한다.
모든 것을 얼려버리는 고난은 무언가 할 것이 남아 있지는 않을까 생각할 수 있는 마음 앞에는 아직 당도하지 않은 것이라 믿어보려고 마음을 다잡는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더 이상 이번만 넘어서자는 다짐과 이번만 넘게 해 달라는 기도를 더는 하지 않기로 한다. 그저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그 일을 해냈음에 만족하기로 한다. 희망은 의지를 불러왔지만, 반대로 불안을 크게 키우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만 품는다.
오늘을 살고, 오늘만 잘 살자,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