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먼저 하늘이 보였다.
시야를 방해하는 높은 건물이 없는 곳. 시각적으로 자극적인 사이너지는 없다. 가끔 보이는 간판은 투박하고 정직하다. 사람도 차도 적다. 그래서 눈 끝에 머무는 건 산과 하늘이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시각적인 것에 굉장히 예민하다. 견물생심이라는 말이 예부터 있어온걸 보니 그래도 나와 비슷한 사람은 예전부터 꽤 있었나 보다. 주말 당일치기로 서울을 벗어났더니 가장 먼저 눈에 보이는 것이었다. 하늘, 그리고 산. 자연. 평일동안 내 눈은 서울의 시각적인 도파민에 절어 지쳐있었나 보다. 눈이 시원해지는 느낌, 그 상쾌한 감각이 타고 흐른다.
주말 하루, 당일치기로 부여를, 그리고 한 주 텀을 두고 다시 공주를 찾았다. 여행이라기에는 그 지역에 머문 시간이 귀여울 뿐이지만 백제의 두 도시에서 맛있는 지역 음식을 먹고, 지역 박물관에서 역사와 문화를 느끼고, 시장 구경을 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내가 여행을 추억하는 방법 중 하나는 바로 음식, 식도락 여행의 즐거움을 아시는가.
해외여행을 다녀와도 그곳이 좋은 기억, 혹은 그렇지 않은 기억으로 분류하는 데 있어서 내게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음식이다. 입맛에 맞는, 다양한 음식이 얼마나 많았는가..! 그래서 음식의 종류가 다양하지 않았던 나라, 혹은 너무 독특해서 영 적응이 어려웠던 나라는 여행 기간 내내 식당 찾느라 힘든 기억이 많다. 반면 국내 여행에서는 사실 다 ‘먹어본 메뉴, 아는 맛’이 대부분이지만, 지역에서 유명한 곳은 또 다르다. 수시로 새 음식점이 생기고 문을 닫는 곳이 있는 서울과는 달리, 지역의 식당은 대체로 한 자리에서 오래 운영한 곳들이 많다. 역사가 있는 식당의 맛은 깊이가 다르니까.
당일치기 국내 여행은 점심을 먹으며 시작된다. 오전에 이동을 마치고 점심으로 그 지역의 첫인상과 마주한다. 부여의 첫 끼는 곰탕이었다. 시장 귀퉁이에 자리 잡은 곰탕집. 들어서니 능숙하게 자리로 안내해 주신다. 메뉴도 몇 없어서 식사는 금방 나올 수 있었다. 곰탕 옆에 놓인 시금치 무침. 많이 넣어 드시라고 하는 아주머니의 말씀에 따라 크게 두 젓가락을 담아 곰탕에 넣었다. 와, 시금치를 곰탕에 넣은 적은 처음인데 이렇게나 맛있다니. 정말 맛있게 한 그릇을 뚝딱했다. 부여의 맛집, 이 맛에 또 찾아오게 될 것 같다.
밥을 먹은 후 국립부여박물관으로 향했다. 어릴 때 견학으로 갔던 박물관은 어쩜 그렇게나 재미가 없었을까. 돌은 돌이요 철은 철로 보였던 그 시대 박물관과 달리, 요즘 박물관은 많이 달라졌다. 부여에서는 제일 유명한 백제금동대향로를 활용한 영상 전시가 진행 중이었다. 게다가 향로에 넣었던 다양한 재료의 향을 직접 맡아볼 수 있는 후각 체험 전시도 있었다.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꼼꼼히 관람하니 기대치 않은 재미가 있더라. 나이가 들면서 문화재를 보는 시각도 넓어졌는지, 어린 시절 봤던 돌, 항아리, 귀걸이.. 이런 게 다 재미였다. 게다가 관람비도 무료. 백제의 사비인 부여를 여행하는데 박물관을 오길 참 잘했다.
마지막은 부여의 성흥산. 5분이면 오를 수 있고 ‘하트산’으로 유명하다. 하루동안 부여의 맛과 역사, 자연까지 다 누릴 수 있다. 쇼핑으로 하루가 지나가버리는 대도시보다 더 할 수 있는 것과 느낄 것들이 많다. 잘 보낸 것 같은 하루. 버릴 것이 없던 시간들로 채웠다. 핸드폰을 보거나, 필요치 않은 물건을 괜히 사는 낭비 없이. 무해한 것들이 눈에 들어왔고, 원래 마음이란 것도 보이는 것에 영향을 받는 법인데, 부여에서의 내 마음은 오랜만에 스트레스가 없었다.
부여를 다녀온 후, 2주일이 지났고 이번 주말엔 공주에 가기로 했다.
마찬가지로 점심 먹고 시작한 하루 일정. 고민 끝에 칼국수를 골랐고, 칼칼한 맛의 칼국수에 겉절이 김치, 사이드로 시킨 수육을 더하니 한 끼에 좋은 기분이 더해졌다. 칼국수는 나의 소울푸드이다. 그만큼 많이 먹어본 게 칼국수인데도, 새로운 곳에서 맛보는 칼국수는 또 새롭다. 공주 여행이 빨간 국물이 보글보글 끓던 진한 칼국수의 맛과 함께 기억될 것 같다.
공주는 제민천 주변으로 귀여운 곳이 많았다. 공주 밤이 들어간 디저트를 한 손에 사들고 조용한 거리를 걸었다. 참 조용하다, 눈도 편하고 귀도 편하니 이렇게나 좋구나. 그동안 눈과 귀로 도파민을 꽉꽉 채워 넣느라 참 피곤했구나. 발이 닿는 대로 걸었더니 중동 성당까지 왔다. 의외로 강아지가 많은 곳이다. 온순한 강아지들이 사랑받고 자라는 모습이 귀엽다. 길을 걷다가 자꾸 인사하게 된다. 안녕 멍멍아. 그냥 길을 걷는데도 재밌다.
무령왕릉과 나란히 자리한 국립공주박물관에서는 마침 무령왕에 대한 전시가 진행되고 있었다. 전시는 화려한 백제 문화와 죽은 무령왕에 대한 예를 갖췄던 성왕의 스토리에 따라 관람객을 이끌었다. 무령왕릉을 발견, 발굴했을 때의 무덤을 지키고 있던 진묘수라는 것, 보자마자 왠지 집 지키는 멍멍이 같다 생각했다. 그래서 이 동네에 강아지가 많은 건가… 쓸데없이 연결 지어 보다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상상의 동물이라는 진묘수의 뒤태는 영락없는 강아지였기 때문이다. 엉덩이를 퉁퉁 쳐주고 싶은 진묘수. 그러나 실제 땅 파다 발견한 무령왕릉, 그 안에 텅하니 서있던 진묘수를 처음 봤을 때는 얼마나 존재감이 컸을까!
부여와 공주, 두 곳에서 해 보니 알겠다. 지역 여행에 박물관을 꼭 넣자. 박물관은 여행의 기억을 풍부하게 해 주는 좋은 재료가 된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
다시 눈에 들어오는 건물들과 차. 눈앞을 빼곡히 채우는 사람들의 움직임. 도시의 삶을 살면서 피할 순 없겠지.
견물생심. 아파트를 바라보다 보면 빨리 자가를 마련해야 할 것 같고, 차를 쳐다보고 있으면 내 차는 언제 바꾸지 뭘로 바꾸지 괜히 생각하게 된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다 보면 옷도 사야 할 것 같고 가방, 신발도 사고 싶어 진다.
도로에 심어진 가로수는 ‘자연'으로 보이지 않는다. 도시의 건물에 액세서리처럼 붙어있는 수준의 나무들인걸. 멀리 산이 보이지만, 말 그래도 멀리 보인다. 자연은 도시인들에게 가까운 존재일까.
진짜 산에 올라가지 않더라도, 조금만 여백이 더 있다면 하늘이 보이는데. 사람 손으로 만든 것들이 아닌, 그저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들이 보이는 건데. 그럴 땐 견물생심이 아니라 무슨 말을 써야 할까. 짧게 지역여행을 하고 왔더니 마음이 조금 깨끗해져 왔다. 욕심, 혹은 조바심 같은 게 사라진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