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
생각의 크기
소년은 달렸다. 높은 담장 사이로 작게 뚫려 있던 문이 열린 모습을 처음 본 훈이는 몇 년간의 양육과 교육의 성과는 모두 잊은 듯 처음 발견되었던 당시처럼 짐승의 본능으로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가끔 멈춰 주변을 두리번거리기도 했지만 자신을 가두었던 집의 빛과 냄새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사는 도시의 흔적을 찾아 사냥하듯 몸을 낮추고 맹렬히 질주했다.
2015년, 어린이용을 버리고 성인용 타블렛PC를 만난 소년은 더 큰 세상을 여행하기 시작했다. 비록 직접 만나고 이야기를 나눌 순 없지만 화면 너머로 자신과는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의 다채로운 삶을 보며 지적 호기심과 미지의 세계를 향한 동경을 조금씩 채워갔다. 두 양육자의 돌봄이나 문자 위주의 책, 잘 가공된 텔레비전 속 영상으로는 느낄 수 없던 생생한 삶이 이어지자 훈이는 식사를 거를 정도로 이 세계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여행이 길어지면 질수록 그는 공허해졌다. 말을 걸고 싶고 궁금한 것을 물어보고 싶었지만 철저히 외부로 나가는 신호가 차단된 환경 속에서는 일방적인 관광일 수밖에 없었고, 따분하고 무기력한 여행자가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참여가 아닌 구경뿐이니까.
보상 차원에서 선물로 받은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다. 머지않아 동영상도 찍기 시작했다. 기술은 제법 익혔으나 내용이 문제였다. 갇힌 소년이 찍을 수 있는 것이라곤 숙소 내부 풍경과 정물들, 그리고 거의 24시간 자신과 함께 있는 두 양육자가 전부였기에 소재가 바닥나서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가끔씩 인터넷에서 본 타인들의 영상 클립들을 따라해 보곤 했지만 자기만의 이야기가 없이 형식만 따라 하기에는 이마저도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늘이 보이는 마당에 나가 자연을 찍을 때면 자신의 세계가 딱 그만큼의 크기란 걸 느껴서 훈이는 서글퍼졌다. 어느 날인가 뷰파인더로 구름을 보던 소년은 조용히 읊조렸다. 차라리 책만 보고 글로만 적을 때가 나았어.
그러다가 전국적으로 1인 방송이 유행하자 이미 웹 영상에 중독된 소년은 많은 유튜버들처럼 자기만의 생각을 열심히 영상에 담았다. 문득 떠오르는 유아 시절 숲속 생활 이야기나 감금 생활의 하소연과 바깥 세상에 대한 갈증은 자기만의 비밀 폴더를 만들어 은밀히 보관하고, 두 명의 보호자에게는 그들이 좋아할 것 같은 이야기 일부만 보여주었다. 6년 넘게 소년을 지켜보던 연구자들은 극히 일부만 봤음에도 불구하고 관찰 대상이 범상치 않은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순히 지능만 높은 게 아니라 주어진 정보와 과제를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자신에게 필요한 형태로 정리하고 다양한 형태, 그러니까 글, 그림, 사진, 동영상 등으로 적절히 표현할 줄 아는 소년은 마치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식에게, 모든 교육자가 자기 학생에게 원하는 이상적 모델이었다. 외부에 공개하여 더 많은 지원과 교육을 받게 하면 좋을 텐데, 라고 한 연구자는 잠시 혼잣말을 하기도 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니 기다리라고 한 어딘지 모를 윗선의 목소리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며 모든 독백을 잠식했다.
2016년 말, 나라 전체가 혼란스러워진 시기부터 점차 산골 소년 훈이를 위한 국가의 지원은 줄어들었고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모든 지원이 끊겼다. 결국 두 연구자 이외의 상주 인력이 사라진 첫 날, 소년은 야생으로 돌아갔다. 아니, 어쩌면 사람들이 모인 도시로 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비 더 미디어 Be the media
일상으로 돌아온 아라는 고민했다. 문서에 적힌 대로라면 정부에서 숨긴 일이라 어설프게 신고를 하면 더욱 진실이 감춰질 것 같았고, 언론에 제보할까 생각도 했지만 매스컴의 먹잇감이 되어 삶을 난도질당한 일반인들의 사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함부로 떠들 수도 없었다. 보통 영화를 보면 이런 비밀을 공유한 주변 사람들도 고통을 받기 때문에 해온 언니에게조차 이야기하기가 망설여졌다. 가족보다 더 소중한 언니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면 안 되니까.
누우려고 잠을 자면 사진 속 소년이 말을 걸어왔다. 자신을 찾아 달라고, 갇힌 집에서 내보내 달라고 하소연하는 슬픈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부모 없이 자랐다는 사연을 읽을 땐 꼭 자신의 이야기 같아서 아라는 당장이라도 뭔가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고작 초등학생인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그리 많아 보이진 않았다. 아예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결국 돌고 돌아 늘 그랬듯 아라는 해온 언니에게 조언을 구할까도 생각했지만 얼마 전부터 힘든 일이 있는지 잔뜩 지친 표정만 보여주다가 아예 휴학 준비까지 한다고 해서 하릴없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아라는 오랜만에 텔레비전을 틀었다. 작은 방에 누워 할머니 잔소리 없이 스마트폰으로 마음껏 영상을 보다가 오랜만에 텔레비전 방송을 보니 제법 낯설었다. 재방송 같은 뻔한 이야기,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 내가 살고 있는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 대체 아무도 안 볼 것 같은 구태의연한 이런 방송 프로그램은 누가 만드는 걸까. 방송국 사람들은 요즘 시청자들과 미디어 환경에 대해 고민하기는 하는 걸까. 이런 생각을 하며 리모컨 전원 버튼을 누르려는 찰나 아라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 광고 하나가 요란하게 시작되었다.
"대국민 오디션, '비 더 미디어'. 미디어가 되어 모두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기회를 드립니다. 미디어 크리에이터로 활동하는 모든 분들에게 열려 있습니다. 최후의 생존자 1인에게는 저희 방송국의 프라임 타임 한 시간을 온전히 드립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닌 3개월간 12회. 예능, 교양, 시사, 드라마, 광고 같은 기존 포맷부터 먹방, 눕방, 잡담, 브이로그, 게임, 뷰티 등 예전에는 인터넷으로만 볼 수 있던 포맷까지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창의적이고 끼가 넘치는 크리에이터들의 많은 참여 기다립니다. 지금 참가 신청하세요."
아라는 이거다 싶었다. 방송국 웹사이트에 들어가서 공지사항을 읽으니 더욱 의욕이 불타올랐다. 방송 시간과 제작비를 지원하는 건 기본이고, 최소한의 심의 규정만 준수하면 무엇이든 방송해도 좋다고 했다. 불상사를 막기 위해 법률 전문가를 포함한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도 지원해준다고 했다. 혹시 이곳에서라면 남들의 간섭 없이 자유롭게 훈이란 이름의 소년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혹시 그의 친부모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아라는 오디션 프로그램을 극도로 싫어하긴 했지만 본선 정도에 오르기만 해도 자기 손에 들어온 자료를 한 번은 쓸 수 있을 것 같아 잠시 타협을 하기로 결심했다.
부치지 못한 자료
훈이를 보살피고 연구하던 두 연구자 중 훈이 또래의 자녀를 갖고 있던 한 사람은 늘 마음이 무거웠다. 처음엔 연구 대상으로 만났지만 적지 않은 시간 동안 함께 하다 보니 훈이가 마치 양자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무작정 세상에 공개하자니 국가와 비밀 서약을 한 자신의 입장도 곤란했고 해일처럼 밀려들 세간의 관심을 불쌍한 소년이 감당할 수 있을까도 걱정됐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소년에게 자유로운 삶을 선사하고도 싶었지만 그런 은밀한 삶은 소년에겐 또 다른 격리가 될 것 같아 두려웠다.
그러다가 정부의 지원이 끊겼다. 첫 한 달은 조만간 다시 지원금이 오겠지 라며 기다렸고, 두 달까지는 소년을 향한 순수한 애정 때문에 봉사라고 생각하며 버텼지만, 남부럽지 않은 대우를 받다가 갑자기 모든 지원이 끊기자 마음이 흔들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동료와 고민을 나눠 봐도 뚜렷한 해결책은 없던 나날을 보내던 중 갑자기 훈이가 사라졌다. 어차피 모든 이에게 존재 자체가 비밀인 아이라 실종 신고를 할 순 없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찾아 나설 수도 없었다. 출생 신고도 되어 있지 않은 아이를, 그것도 머리는 비상하지만 지극히 평범하게 생긴 10대 소년을 어디 가서 찾는단 말인가. 상부에 보고하니 일단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를 정리해서 제출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지만 그다지 관심이 있는 말투는 아니었다. 근 몇 달간은 보고할 영수증도 없던 터였으니 이미 그들에게는 관심사는 아니었던 것이다.
연구자는 제보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믿을만한 방송국 피디를 엄선하여 연락했다. 그리고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만나기로 했다. 계획대로였으면 제보자A가 휴게소 뒤쪽 벤치에 두고 간 7년간의 연구 자료를 정의감 넘치는 방송국 피디가 입수하여 유명한 시사 프로그램에서 대대적으로 공개했을 것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고속도로 상행선과 하행선을 착각한 피디가 약속 시간에 딱 맞춰 건너편 휴게소에 도착했고, 첩보 작전 하듯 자료만 두고 사라지기로 했던 제보자는 그런 사실을 모른 채 제 시간에 자리를 떠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료는 바람에 날려 흩어졌고, 때마침 아라가 그곳에 도착했다.
미디엄에서 미디어로
방송국 공연장 객석에는 빈자리가 없었다. 무대도 화려한 조명으로 빛났다. 고작 오디션 예선 피칭이지만 다들 포부가 대단했다. 어이없고 황당한 의견도 있었지만 적지 않은 참여자들이 기존 방송에선 보지 못한 내용을 가지고 객석의 심사위원단 앞에서 열띤 웅변을 펼쳤다.
- 케빈 베이컨 6단계 법칙을 직접 실험해 보겠습니다. 매주 세계적인 스타 한 명을 정해서 그 사람과 제가 몇 단계 만에 이어지는지 실험해보겠습니다.
- 초소형 카메라 하나만 주시면 제가 직접 난민이 되어 유럽 어느 나라의 국민이 되어 보겠습니다.
- 국내 대기업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기업들을 대상으로 제 방송 시간을 경매로 팔겠습니다. 그 수익으로 다른 방송국의 방송시간을 사서 더 큰 경매를 한 뒤에 해외로...
- 저출생국가요? 엄연히 살아있는 국민의 목숨도 지켜주지 못하는 나라가 무슨 저출생을 걱정합니까. 산재 사망사고 희생자가 매년 천 명에 육박합니다. 저는 산재 사고를 막기 위해 전국 모든 공사현장에 감시 카메라를 설치하겠습니다. 제 방송시간 동안에라도 모든 현장을 돌아가며 비춰준다면 그 시간만큼은 희생되는 사람이 없지 않겠습니까. 제 프로그램 제목은 그라운드 제로입니다.
- 혼자 카메라를 들고 위험국가로 분류된 나라를 찾아가겠습니다. 주민들을 만나 그곳의 진짜 삶은 어떤지...
- 시한부 판정을 받고 투병중인 환자들의 마지막을 함께 하겠습니다. 삶에서 죽음을 분리하는 시대는 끝났습니다.
- 제가 마음에 드는 짝을 만나 결혼하는 과정을 담는 리얼리티 쇼를 만들겠습니다. 어디까지 공개할 거냐고요? 모든 것이요.
- 흰 벽에 점 하나를 찍고 그것만 비추겠습니다. 현대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명상입니다. 단 한 시간이라도...
- 개들은 국적이나 언어를 초월하여 소통할까요? 제가 전 세계를 다니며 확인해보겠습니다.
아라는 발표를 마치고 무대 뒤 대기실로 들어왔다. 여전히 다리가 떨리는지 두 손으로 무릎을 꽉 잡고 있었다. 할 수 있는 모든 걸 쏟아내고 내려왔으니 후회는 없었지만 처음 계획과 꽤 달라진 발표가 몹시 걱정됐다.
- 제 꿈은 미디어 큐레이터입니다.
아라는 밤새 준비한 연설을 술술 읽어 내려갔다. 단지 읽는 것을 넘어 온 힘을 다해 객석에 앉은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호소했다. 어두운 좌석들 어딘가에 해온 언니가 앉아 있으면 힘이 되었겠지만 이건 혼자 해내야 하는 일이라고 아라는 다짐했다.
- 저는 어리고 아는 것도 많지 않고 경험도 적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골라주는 일은 잘 한다는 이야기를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누군가의 의뢰가 들어오면 가장 적당한 내용의 콘텐츠를 골라주는 일을 해보고 싶습니다. 없다면 직접 만들 수도 있겠죠.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큐레이터라고 부른다니 저를 미디어 큐레이터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누군가의 의뢰가 들어오면 많은 자료를 검색해서 가장 적당한 콘텐츠를 고르겠습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 사람의 취향과 지적 능력, 장애 여부 같은 것을 바탕으로 가장 적당한 전달 방식을 골라 제공하겠습니다. 누군가에겐 유튜브 영상이 잘 맞겠지만 누군가에겐 정신없는 미디어 공해일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는 영상보다 팟캐스트 같은 소리 매체가, 누군가에게는 활자로 인쇄된 책자가 더 적당할 수 있습니다. 알맞은 내용과 형식을 모두 고려해서 의뢰인에게 자료를 전해주는 미디어 큐레이터가 되어 뻔하고 지루한 콘텐츠에 지친 사람들이나 접근성이 차단되어 유용한 정보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가겠습니다. 세 달에 고작 열두 번 방송이지만 그 과정을 거치며 저도 점차 성장할 것이고, 그걸 보는 여러분도 자기에게 맞는 게 무엇인지 점차 알게 될 거라고 확신합니다.
아라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100초란 짧은 시간 동안 준비한 아이템을 발표했다. 대기실은 바로 무대 뒤에 있어서 발표자들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렸지만, 아라의 귀에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얼른 모든 것을 마치고 집에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보이후드, 미디어후드
며칠 전 도서관에서 피칭 준비를 하고 있는데 한 소년이 아라에게 다가왔다.
- 안녕, 아라.
- 누구세요?
- 나 몰라보겠어?
아라는 소년이 '몰'을 발음하기도 전에 앞에 앉은 소년이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비밀문서 속 소년 훈이였다. 동공이 커지고 입도 커졌다. 아마 도서관만 아니었으면 소리를 질렀을지 모른다.
- 어떻게?
훈이는 이곳가지 오게 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산에서 내려와 도시로 숨어든 훈이는 처음에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조용히 지냈다. 하지만 시험 삼아 밤에 외출을 해보니 도시인들은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을 이내 깨닫고는 자연스럽게 활동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찾은 곳은 피씨방이다. 컴퓨터 분야를 독학하며 생각보다 스마트폰과 감시카메라 해킹이 쉽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두 보호자의 스마트폰과 숙소 카메라에 악성코드를 심어서 언제 어디서든 모든 것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만들었다. 당연히 하산 후에도 그들의 모든 활동을 감시했고 방송국 피디와의 만남도 알 수 있었다. 휴게소에서 접선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중 우연히 개입하게 된 아라를 알게 되었고 지금껏 쭉 지켜봤다고 말했다.
- 근데 슬쩍 보니까 오디션 아이템으로 내 비밀을 공개하려는 것 같은데...
- 죄송해요. 허락도 없이. 그만둘까요?
- 아니, 그런 말이 아냐. 그리고 비슷한 또래인데 말 놓자. 응?
소년은 단순히 자신의 비밀을 공개하는 것을 넘어 한 사람의 성장 과정 전체를 다루는 방송을 만들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바로 자신의 사례. 사람이 태어나서 사회화 과정을 거치며 많은 것을 배우고 익히는데 현대인이라면 미디어 교육을 빼놓을 수 없다. 자료를 보면 알 수 있듯 훈이 자신도 사람들의 언어를 배우고, 한국인의 행동 양식을 몸으로 익히고, 말과 글뿐만 아니라 각종 표현도구나 매체를 활용하는 법까지 진화하듯 배우면서 신기함을 느꼈다고 했다. 어떻게 이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흡수하는 거지.
- 물론 재밌었어. 넌 네가 말을 언제 처음 배웠는지 기억해? 난 기억해. 처음 발견되었을 당시부터 어른들의 입소리를 따라하며 말을 배우고,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같은 낱말이나 문장을 반복했지. 마치 유전자나 뇌에 처음부터 입력되었던 것처럼 하나를 배우면 열 가지를 응용할 수 있게 되더라고. 글도 마찬가지야. 처음에는 획 하나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다르게 조합하면 다른 뜻을 지닌다는 걸 모르면서도 열심히 끄적거렸어. 그랬더니 의미가 전달되고 상대방과 소통할 수 있게 되더라고. 그때부터는 내 의지로 적극적으로 학습을 시작했어. 붓으로 그림을 그리고 목소리로 노래를 하고 몸을 흔들며 운동을 하거나 춤을 추기도 했지. 내가 조작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나를 표현하는 수단이 됐어. 물론 너도 알다시피 동물원에 갇힌 원숭이 신세였지만. 읽기 위해 글을 배우고 책을 읽고 자신의 생각을 정돈하여 표현하기 위해 글을 쓰고. 텔레비전으로 동영상을 보며 더 큰 세상을 알게 되었고 얼마 지나서 카메라를 갖게 되었고 내 의도대로 영상을 찍고 편집할 수도 있게 됐어. 그런데 어느 순간 답답해졌어. 아니, 재미가 없었어. 뭔가 표현하고 이야기하고 싶어서 열심히 만들었는데 고작 남이 만든 걸 베낀 거라면 네 기분이 어떨 것 같니. 게다가 내가 볼 수 있는 건 모두 보호자들이 허락한 것들이었어. 바르고 유익하고 무난한 콘텐츠들. 내가 무엇을 볼지 선택할 수도 없고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필요도 없는 그런 뻔한 것들만 보다 보니 내 생각도 틀에 맞춰지는 것 같더라고. 그래서 고민했어. 어떻게 하면 내가 타인의 의도에 휘둘리지 않는 내 이야기를 기록할 수 있을까. 그러다가 알게 된 게 미디어 리터러시였어.
아라는 언젠가 해온 언니가 미디어 리터러시에 대해 이야기해준 것을 떠올렸다. 글을 깨우치게 도와주는 문해 교육 비슷한 거라고 했던 것 같다. 가짜뉴스가 이슈가 될 때쯤이었던 것 같은데... 훈이는 계속 이야기했다.
- 내가 고민하던 것들이 그곳에 있었어. 글을 읽는다고 모두가 글의 내용을 이해하는 게 아니고 글을 쓸 수 있다고 누구나 자기 생각을 타인에게 정확하고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게 아닌 것처럼 현대인이라면 우리 주변의 미디어를 제대로 읽고 제대로 쓰는 법을 익혀야 한다고 생각해. 단순한 독자나 시청자를 벗어나 능동적으로 선택하고 비판적으로 콘텐츠를 바라보며 직접 자기 생각이 담긴 콘텐츠를 만들 수 있는 능력까지 길러야 하는 거지. 내가 몇 년간 산속에서 배운 것처럼.
- 우리도 학교에서 그런 건 배워. 스마트폰으로 영상을 만들고, SNS에 카드뉴스를 만들어서 올리고. 요즘 애들이면 그 정도는 누구나 할 수 있을 걸.
훈이는 할 이야기가 많은지 아라를 데리고 도서관 바깥 조용한 곳으로 이동했다.
- 물론 요즘에는 누구나 쉽게 뭔가를 만들 수 있어. 하지만 대부분 기존 미디어의 제작방식을 고스란히 답습할 뿐 자신이 만지는 매체의 특성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지는 못한 것 같아. 가령 대부분 스마트폰으로 소비하는 유튜브에 영상을 올리면서 방송 다큐멘터리 자막처럼 작은 글씨를 삽입하고, 한 시간 동안 꼬박 지켜봐야만 내용을 파악할 수 있게 만든다면 그 사람은 유튜브를 온전히 이해한 걸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 누군가 미디어 제작자가 된다면, 그게 꼭 유튜브가 아니라 책을 쓰든 블로그를 운영하든 사진을 찍든 팟캐스트를 만들든 다 똑같다고 생각해. 자기가 다루는 매체의 특성을 정확히 이해하고 접근해야 하고, 무엇보다 그것을 접하는 타깃 수용자의 다양한 취향과 욕구를 파악해서 적절한 기술까지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봐.
아라는 무언가 알 것도 같았다. 옷 한 벌을 팔 때도 점원은 구경하는 손님을 빠르게 파악해서 전략적으로 접근하고 적절한 접대 멘트를 날리지 않는가. 아이들에게 몸에 좋은 음식을 먹이는 부모들의 전략은 또 얼마나 영리하던가.
- 내가 숙소에서 탈출한 이유도 중요해. 혼자서 뭔가를 만들면 공허했어. 왜냐면 대상이 없거든. 상대의 반응에 맞춰 다양한 변화를 줘야 재미도 있는데 뭘 해도 잘 했다고 칭찬하는 사람들만 만난다면 어떻겠니. 또 공동작업도 해보고 싶었어. 한 사안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의견도 궁금했고, 그 과정에서 더 좋은 의견이 나올 수도 있는데 늘 혼자 만들다 보니 한계에 부딪히더라고. 매번 같은 노래만 반복하는 느낌이랄까. 무엇보다 내가 만든 결과물로 누군가에게나 세상에 영향을 주고 싶은데 내가 닿을 수 있는 세상은 고작 숙소와 마당이 전부라 무엇을 만들어도 동굴 속 메아리 신세였지. 그래서야 보람이 없잖아.
훈이는 아라에게 이런 저런 생각을 말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대부분 하소연이었다. 아라는 소년의 하소연을 듣는 첫 번째 청취자가 아닐까 생각해서 가만히 들어주기만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저녁이 되어서야 훈이는 아라에게 본론을 말했다.
- 오디션에서 내 비밀을 공개하는 것만으로 끝내지 말고 네 꿈도 함께 발표하면 좋겠어. 친구들이 좋아할 만한 것을 골라주는 게 네 특기라며. 미디어 콘텐츠를 골라주는 걸 네 꿈으로 삼으면 어떨까. 난 미디어 수용자나 제작자 못지않게 골라주는 역할도 중요하다고 생각해. 요즘 세상은 모든 것이 연결되고 있는데 왜 사람들은 여전히 뿔뿔이 흩어져 있을까. 또 전 세계에 수 억 개의 미디어가 있고 콘텐츠가 있지만 그 중에서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 닿는 비율은 얼마나 될까. 소리 없이 사라지는 아까운 콘텐츠들은 또 얼마나 될까. 잘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어주는 역할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할 것 같은데 네가 그걸 해주면 안 되겠니.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고 미디어와 미디어를 이어주는 사람. 그걸 네 아이템으로 삼아서 오디션에 참여하면 좋을 것 같아.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얼마든지 도와줄 수도 있고.
미디엄에서 미디어로
아라는 준비했던 자료를 마지막으로 무대 뒤 화면에 띄웠다.
- 이 아이템으로 첫 번째 파일럿 방송을 만들려고 합니다. 의뢰인이 꼭 진실을 알려달라고 부탁해서 이번만은 큐레이터가 아닌 프로듀서로 활약해 볼까 하는데요. 이 소년의 이름은 훈이입니다. 7년 전 강원도 산 속에서 발견된 소년 훈이는...
산골 소년에 대해 아주 간략하게 소개한 아라는 객석의 심사위원단의 호기심을 끄는 데 성공했다. 반응을 보아하니 예선 통과도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마지막 한 가지만 공개하면 아마 게임 끝이겠지, 라고 아라는 생각했지만 앞으로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지 짐작할 수 없어 불안했다. 훈이 오빠가 다시 잡혀가면 어쩌지. 출생의 비밀을 알 수 있을까. 아니, 어쩌면 이 모든 게 거짓말이면 어쩌지. 지금까지 당당하게 발표했던 모습과는 달리 아라의 속마음은 온통 혼돈으로 가득했다.
끝으로 아라가 출입구를 향해 손을 뻗자 아라와 비슷한 키의 한 소년이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예정에 없던 인물의 등장이라 조명 담당자는 잠시 당황했지만 프로의 솜씨로 재빨리 그를 향해 빛줄기를 비출 수 있었다. 소년은 무대에 올라 아라의 옆까지 당당하게 걸어갔다. 그리고는 마이크를 향해 입을 열었다.
- 제가 훈이입니다.
공연장은 갑자기 요란해졌다. 곳곳에서 휴대폰 플래시가 터지고 방송국 카메라 너머의 관계자들도 요란스럽게 무전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객석 반응만 봐서는 아라의 본선 진출은 확정이었다. □
▮ 참고자료
- 한국언론진흥재단 미디어교육 사이트 www.forme.or.kr
- 르네 홉스(Renee Hobbs)의 '미디어 리터러시의 5가지 구성요소
(출처: 온더레코드 https://brunch.co.kr/@ontherecord/78)
▲ 르네 홉스(Renee Hobbs)의 '미디어 리터러시의 5가지 구성요소
▮ 글쓴이 생각
- "미디어 리터러시의 핵심은 '미디어 되기'에 있다고 본다. 사람을 넘어 모든 사물이 연결되는 초연결시대에는 단순히 적극적인 시청자·생산자를 넘어 개인과 개인을, 집단과 집단을, 미디어와 미디어를 이어주는 間미디어(inter-media)란 개념이 중요하다. 모든 이가 생산자·제작자가 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겠지만 적어도 자기 주변 사람들에게 만이라도 좋은 콘텐츠를 소개해 주는 역할을 해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미디어 활동을 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아무리 유익한 정보라고 해도 전달되지 않고 고여만 있으면 가치가 없듯, 그걸 필요한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소외받는 사람들에게 퍼뜨리고 확산시키는 역할이 미디어 교육의 핵심 가치가 되면 좋겠다. 그리고 그 일을 하는 자신 스스로를 '미디어'라고 생각하면 좋겠다. 그럼 더욱 책임감 있게 활약할 테니까.
▮ 마지막 장면 오마주 - <아이언맨>
출처: https://actmediact.tistory.com/1396?category=791249 [A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