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학준의 <주변>
우리가 따라가야 하는 사람들이 이들이고, 이들을 가장 잘 따라가는 사람이 유능한 자라면, 나는 가능하면 오래도록 무능하고 싶어졌다. - 80p
쓰는 사람은 어떤 자격이 필요한가. 그리고 그가 바라보는 대상은 얼마나 객관적인가. 나는 두 가지 다 명료하게 대답하기 어렵다. 조직 내에서 여러 부서를 전전했고, 그때마다 회사를 바꾼 것 같은 경험을 했다. 적응할 시간도 여건도 부족한 사람이 조직의 문화에 대해 비판적 시선을 가지게 되었다면 조직 문화 자체에 문제가 있는 걸까, 아니며 적응력 부족한 사람이 그저 징징거리는 걸까. 아마도 그것은 쓴 문장들을 읽은 후에 결정되지 않을까. - 275p
할머니는 노래를 불러도 되냐고 했다. 손주에게 들려주고 싶다고 했다. 밤이 깊어질 때까지 할머니는 노래를 불렀다. 노래였는지 울음이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할머니는 카메라를 끝내 신경쓰지 않았다. - 115p
흔적으로만 드러나는 고통이 있다. 이 말이 누군가에게 전해지길 바라면서 내뱉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감정을 흘러내리게 할 수밖에 없어서 토로하는 고통이 있다. 그것들을 어떻게든 붙잡아 '당신의 고통'을 전시하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 고통을 할머니의 행동을 설명하는 서사의 한 단계 안에 박제해 두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이 포맷으로는 가능하지 않다고 믿었다. - 120p
면접에서 방송사가 뭐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귀'라고 대답했다. 듣는 곳이라고. 방송사는 시끄럽게 떠느는 입이라고들 생각하지만, 나는 귀여야 한다고 믿었다. 우리의 목소리는 너무나 크므로, 세상에 존재하는 조용한 함성들을 먼저 듣지 않으면 다시는 들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사라지는 목소리들을 기록해서 사람들을 향해 '여기 목소리가 있다'고 전파해 주어야 한다고 봤다. 그렇게 대답해서 방송사에 들어왔으니 그렇게 하고 싶었다. - 39p
교양 프로그램의 존재 이유는 스스로 말할 힘이 부족한 사람들을 위해 시간을 비워두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PD는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누군가의 이야기를 위한 자리를 비워두는 자다. 자기의 자의식을 지우고 방향을 지우라는 게 아니다. 들리는 대로 담지 않으려 애쓰는 태도가 필요하다. 목소리가 크고 힘이 센 사람의 목소리는 더 잘 들리고, 더 잘 실린다. 애써 고르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나 주류의 목소리만을 담게 될 뿐이다. 남의 말을 경청하기 위해 엉덩이를 자주 떼고 바삐 움직여야 한다. - 180p
어린 시절 좋아했던 교양 프로그램들은 내가 몰랐던 세계가 여기 있다는 사실들을 알려 줬다. 그 프로그램들이 아니었다면 영영 몰랐을 세계들을. 쓰레기가 된 옷들이 어디로 흘러가 쌓여 있는지, 버스를 타지 못하는 장애인들이 어떻게 자신의 집에 고립되는지, 얼마나 많은 빙산이 녹아내리고 숲이 불타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열악한 노동 조건에 신음하는지, 편안한 소파 앞에 앉아 바라보는 세상은 얼마나 좁은지 알려주는 이야기들이 좋았다. 그래서 이 일이 좋았다.
하지만 정작 일하면서는 이 장르의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고 있음을 느꼈다. 우리는 다소간 모호했다. 세상에 대한 해상도를 높이고, 세상을 달리 보이도록 하는 게 교양의 자리라는 생각이 나만의 착각이었던 건 아닌가 싶을 떄가 늘었다. 이 자리를 지켜내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밀도 낮은 정보들을 생산하는 데 몰두하는 모습에 혼란스러웠다.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이유로 계속 '당의정'을 입히는 데에만 집중하는 태도들이 어색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프로그램들이 왜 '교양'이어야 하는지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 227p
문제는 영상을 만드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영상을 통해 말해야 하며, 말로써 남겨서는 안된다는 기묘한 의식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상 무엇이 말해지고 또 무엇이 남느냐는 자신들의 통제 범위 바깥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신은 모든 것을 손에 쥔 것 같은 태도로. ... 영상에 모든 것을 내던졌다고 해더라도 제작자는 거기에 대해 언제나 말할 것이 남아 있다. ... 특히나 자신들의 독해를 언제나 옳은 것으로 여기고 유지하는 유독한 독자들의 세계가 되어 갈수록, 해석에 대한 권한을 온전히 독자의 것으로 남겨 둬선 안된다는 것이다." - 280~281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