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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문희 Jul 30. 2024

주변인, 언젠가 재발견 될

오학준의 <주변>

  오학준. SBS 소속 13년차 시사교양PD. <궁금한 이야기 Y> <그것이 알고 싶다> 등 SBS 간판 교양, 시사프로그램은 물론 <짝> <영재발굴단> 등 교양인지 예능인지 영역 구분이 모호한 프로그램을 두루 거쳤다. 'SBS 스페셜'에서 방영한 다큐 <취준진담>으로 이달의 PD상도 받았다. 오늘 쓰는 글은 그가 최근 출간한 <오학준의 주변>(출판공동체 편않. 이하 <주변>) 독서후기다.


  ... 이렇게 이력을 늘어놓고 보니 이상하다. 내가 오학준에 대해 객관적으로 쓰는 것이 가능한가. 나는 그를 어디까지나 편파적으로 애정해 왔다.



  학준과 나는 책을 주고 받는 사이다. 처음 알게 된 곳은 군대. 2009년 입대한 공군 전투비행단에서 그는 2년 내내 내 선임으로 살았다. 하지만 그가 나를 선임처럼 '조진' 적은 한 번도 없다. 학준은 늘 군생활에 심드렁했다. 몸은 비록 군대에 있지만, 내가 속한 곳은 여기가 아니라는 듯. 긴 팔다리로 휘적휘적 제초기를 휘두르고 난 다음 그가 땀범벅인 몸으로 찾는 곳은 책상이었다. 그러고는 가라타니 고진, 자크 라캉 같은 정치철학자의 책에 금세 몰입했다.


  내가 '저도 이 책 봤는데' 우물우물 몇 마디 얹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오!" 외마디와 함께 그는 이것도 봤냐 재밌지 않냐 하다가 이것도 봐라 저것도 봐라 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너무 유명해진 문학평론가 신형철을 학준 덕분에 그때 봤다. 우리는 독서 경험을 공유하는 책 얘기를 하며 도무지 흐르지 않는 시간을 밀어 보냈다. 시시껄렁한 농담도 책을 매개로 했다. 주임원사 때문에 열받는다 한마디 하고싶다는 둥 불만에 "해 봐. 잃을 건 사슬밖에 없잖아"라는 말이 돌아오는 식이었다.


  <주변>의 제사는 소설가 안톤 체호프의 소설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속 문장, 이후 글 하나하나 두서넛씩 각종 책의 인용으로 채워 나가는데 그 기원을 알 것 같았다. 이건 장식이 아니라 학준의 평생이다. 정확한 문장을 쓰고싶은 열망을 이기지 못해, 남의 문장마저 그러쥐고야 마는.




  학준이 거쳤던 PD 생활 초년기를 나는 모른다. 절친한 이들도 어째서인지 연락을 하지 않는 시기가 있다. 인생에서 중요하다 여기는 사안이나 관념을 두고 우리는 크게 부딪친 적이 없다. 그냥 어쩐지 연락하기가 '뭐 했다'. 그래서 그가 2012년부터 PD 일을 하게 된 것도, 5부작 다큐 <최후의 권력> 촬영 중 말라리아에 걸려 쓰러진 줄도 몰랐다. 그와 내가 다시 본 건 2014년, SBS 건물 아래서 담배를 피우던 중이었다. 당시 나는 시사교양 PD 면접을 보러 간 차였는데, 그는 재작년에 이미 입사했다고 했다. 그땐 "이러다 또 선임되는 거냐"며 웃었다. 아니었다. 나는 다음해까지 SBS 면접에서 고배를 마셨다.


  "이 글은 실패담"이라는 <주변> 첫 문장에 그래서 절반만 동의한다. 그가 말하는 실패를 나는 꽤 오래 부러워 했다. 내게는 일하다 실패할 기회가 없었으니까. 아마도 PD를 꿈꾸는, 혹은 한때 꿈꿨던 사람들 역시 나와 비슷하게 읽을 것이다.


  다만 그 이후 10년, 그가 어떤 생각을 하며 일터에서의 삶을 견뎌냈는지는 조금은 안다. <주변>의 순서는 그의 직업 궤적을 따른다. 다큐 <최후의 권력>과 <짝> 조연출부터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 <영재발굴단>, <궁금한 이야기 Y>, <그것이 알고싶다> VCR 연출까지는 흔히 생각하는 시사교양 PD의 일과 다르지 않다. 그 중간에는 파일럿 프로그램 <18초> 실패기와 이달의 PD상을 받은 2부작 다큐 <취준진담> 제작기가 놓인다. 의외는 마지막 두 장이다. 편성PD로의 전환과 유튜브팀 팀장으로서의 활동. 그 앞에는 우울 증세로 인한 긴 휴직 기간의 방황이 적혀 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우리가 따라가야 하는 사람들이 이들이고, 이들을 가장 잘 따라가는 사람이 유능한 자라면, 나는 가능하면 오래도록 무능하고 싶어졌다. - 80p


  그가 <짝> 조연출 경험 말미에 적은 문장에서 힌트를 얻는다. 다수 연애 프로그램이 '리얼'을 표방하지만, 제작을 위해 통제된 상황 자체가 연출이다. 시청자는 영상 속 갈등을 보며 특정 캐릭터에게 감동하거나 분노하도록 유도된다. 복잡다단한 현실과 달리 그 판단은 어렵지 않다. 그게 전부일 리 없는 현실의 한 인간은 영상 속에 '그게 전부인 양' 박제된다. 박제를 말끔하게 잘해낼 수록 성공한 연출자다. 근데, 그래도 되나? "(그럴) 권한이 우리에게 있는가?"


  학준은 끊임없이 '그래도 되나'를 묻는다. 방송사는 기업이고, 제작기획서는 예산을 늘리려는 제작진과 줄이려는 편성 사이의 전장이다. 노동집약적인 방송의 특성상 비용 절감의 첫 칼질은 인건비를 향하기 쉽다. 정규직보다는 비정규직, 프리랜서를 자르는 게 편하다. 정규직의 인센티브 등 '몫'을 지키기 위해 비정규직이 손해를 봐야 하는 상황도 있다. 정규직 PD의 우월 전략은 자명하다. 그런데, 그래도 되나? 그는 차마 유능하지 못했다. '리얼' 연애프로그램에 대한 거부감과 다르지 않은 결이다.


  <영재발굴단> 제작기를 담은 8장 '스위트 홈'에는 '바둑 신동' 이야기가 나온다. 재능은 분명한데, 요즘 어째 연습이 게을러진 아이다. 한때 선수를 꿈꿨던 아버지는 자식이 본인처럼 실패할까 두려워, '교정'을 목표로 방송국에 제보한다. 하지만 막상 제작진이 만난 아이는 바둑이 싫증난 모습이다.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할까봐 그만두지 못할 뿐이다. 학준은 당초 기획을 급박하게 바꿔 '신동'이 아닌 '괴로운 아이'를 조명한다. 그러고도 스스로에게 묻는다. "사건의 관찰자로서 우리는 어디까지 말할 수 있을까? 방송하는 사람들은 마주한 사건에 대해 어디까지 책임질 수 있을까? 방송은 길어봐야 몇 주에 불과하다."(154p)


  걷어낼 건 걷어내야 성공한다는데, 학준은 도통 그러지를 못했다. 그가 정신분석학을 공부하던 시절 잔여, 잉여 같은 용어를 즐겨 말하던 것이 기억난다. 그는 스스로 주류가 되지 못했다며 '주변'이란 말을 썼지만, 어떤 면에선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특별한 몇몇을 제외하면 중심부가 아닌 주변부에서 중심을 바라보는 삶을 산다"며 "이곳에서만 보이는 풍경"(272p)을 쓰겠다는 말도 그러니 일부만 진실이다. 그는 어느 정도는 제 발로 주변부를 향했다. 때로는 심드렁하게, 중심이 제 자리가 아닌 양.




  첫 장인 '가려진 정산서 사이로'에 따르면 누군가 부당한 일을 겪고, 마음을 다치고, 때로 누군가가 목숨을 잃는 일이 벌어졌던 모양이다. 그런데 학준은 그 사건의 세부를 하나도 적어두지 않았다. 고발이나 분석 목적이 아닌 짧은 기록을 포함한 단상집이니, 장르적 한계 안에서 찾아낸 나름의 균형점일 거라고 일단 짐작한다.


  동시에 어쩌면, 이같은 균형이 지금 학준의 자리라는 생각도 든다. 그는 중심과 그 바깥을 동시에 본다. 중심이 무심히, 또는 중심임을 유지하기 위해 하는 행동을 두고 '그래도 되나'를 묻는다. 그렇다고 바깥으로 가지는 않는다. 그는 행동주의자가 아니다. 소리 높여 '비정규직 차별 철폐' 운동에 나섰던 적은 없다. 주류를 비판하면서도, 행동하지 못하는 자신이 부끄러워 차마 큰 목소리는 못 낸다. 다만 "침묵이 침묵을 낳은 건 아닐까"(32p)를 "우물주물" 말한다. 안 하진 않지만, 주절거리며 한다.


  쓰는 사람은 어떤 자격이 필요한가. 그리고 그가 바라보는 대상은 얼마나 객관적인가. 나는 두 가지 다 명료하게 대답하기 어렵다. 조직 내에서 여러 부서를 전전했고, 그때마다 회사를 바꾼 것 같은 경험을 했다. 적응할 시간도 여건도 부족한 사람이 조직의 문화에 대해 비판적 시선을 가지게 되었다면 조직 문화 자체에 문제가 있는 걸까, 아니며 적응력 부족한 사람이 그저 징징거리는 걸까. 아마도 그것은 쓴 문장들을 읽은 후에 결정되지 않을까. - 275p


  예전엔 좋은 책, 좋은 다큐멘터리가 누군가의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잠시라도 콘텐츠를 통해 '서 있는 자리'가 달라지는 경험을 하면서, 직전까지 고수했던 자신의 입장을 바꿀 수 있다고 말이다. 요즘은 그보다 냉소적으로, 대부분 사람이 자기 자리에 그대로 앉아 '왜곡 방송'이니 '편파적 기사'니 욕이나 하고 만다고 여긴다. 생각을 바꾸는 사람은 이미 생각을 바꿀 준비가 돼 있는 사람뿐 아닐까. 그럼에도 가끔은, 앉은 사람도 설 때가 있다고 상상한다. 이건 어쩔 수 없는 믿음의 영역이다. 누군가 우연히, 자신을 바꿀 마음 준비가 됐을 때 그를 이끌 텍스트가 없다면 어떻게 되겠나. 어느 날 문득 집어든 책을 읽다가 벌떡 일어서는 사람이 과연 없을까. (참고로 이 책은 저널리즘 콘텐츠 '생산 연구'의 측면에서도 읽을 가치가 있다.)


  내가 <주변>에서 가장 인상깊게 읽은 대목은 6장 '팝니다 : 타인의 고통, 공감한 적 없음' 속 할머니 이야기였다.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 촬영차 '책 읽는 할머니' 촬영에 나선 것인데, 그 책을 가져다 준 손주가 할머니와 함께 서점에 가는 장면을 찍으면 '좋은 그림'이 될 것 같았다고 한다. 하지만 할머니는 손주가 먼 곳에 있다며 만날 수 없다고 했고, 촬영 마지막 날 밤이 돼서야 슬며시 그에게 "손주 같다"며 이야기를 꺼냈다. "(손주가) 왜 못 와요?" 할머니는 손주가 "바다"에 있다고 했다. 학준이 직접 쓰진 않았지만, 할머니의 손주는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학생이었다.


  학준은 이 이야기를 방송에 담지 않았다. 또다시 '그래도 되나' 의문이 들어서다. 존재하는 상처를 잊으라는 사람들에게 맞서 기억하는 일은 중요하다. 하지만 당사자가 겪은 고통을 해석할 권리가 언론에 있나? 차마 꺼내놓지 못하는 고통을 굳이 끄집어내고 반복 재생한 결과, 당사자가 잊지 못하는 고통에 시달리게 만드는 것은 아닌가.


  할머니는 노래를 불러도 되냐고 했다. 손주에게 들려주고 싶다고 했다. 밤이 깊어질 때까지 할머니는 노래를 불렀다. 노래였는지 울음이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할머니는 카메라를 끝내 신경쓰지 않았다. - 115p


  흔적으로만 드러나는 고통이 있다. 이 말이 누군가에게 전해지길 바라면서 내뱉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감정을 흘러내리게 할 수밖에 없어서 토로하는 고통이 있다. 그것들을 어떻게든 붙잡아 '당신의 고통'을 전시하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 고통을 할머니의 행동을 설명하는 서사의 한 단계 안에 박제해 두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이 포맷으로는 가능하지 않다고 믿었다. - 120p


   생각해 보면 학준이 좋아하는 아도르노, 벤야민도 혁명가는 아니었다. 그들은 비판하고, 부끄러워하며 끊임없이 주절거리는 사람이었다. 그 기록에 영감받은 사람들이 또 무언가를 쓴다. 책을 덮은 후 며칠이 지난 지금도, 어느 할머니의 울음 같은 가락이 머릿 속에 웅웅거린다. 윤리라는 것이 있다면 대부분은 주저하는 자의 상흔에서 보이지 않나. 금은 학준의 심드렁이 이따금 나타나는 그만의 방어기제라는 것을 안다. 그는 차가울 때에도 뜨겁지 않은 적이 없다. 나는 '재발견'이라는 말을 믿는다.


학준의 저술 후기를 보다가 살짝 눈물이 났다. 영화 <어바웃 타임> 속 아버지가 "나는 살면서 세 남자를 사랑했다"며 자신을 언급하자, 기쁘게 마음에 담는 엉클 데즈먼드처럼.




  아래는 내가 인상깊게 읽은 대목이다. 학준과 나눈 긴 시간 나눈 대화의 흔적을 보며 나는 또 웃는다. 내 아이디어 같은 문장도 실은 그에게 빚진 것이다. 정확하고픈 내 욕망을 그의 글로 대신해 본다.


  면접에서 방송사가 뭐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귀'라고 대답했다. 듣는 곳이라고. 방송사는 시끄럽게 떠느는 입이라고들 생각하지만, 나는 귀여야 한다고 믿었다. 우리의 목소리는 너무나 크므로, 세상에 존재하는 조용한 함성들을 먼저 듣지 않으면 다시는 들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사라지는 목소리들을 기록해서 사람들을 향해 '여기 목소리가 있다'고 전파해 주어야 한다고 봤다. 그렇게 대답해서 방송사에 들어왔으니 그렇게 하고 싶었다. - 39p


  교양 프로그램의 존재 이유는 스스로 말할 힘이 부족한 사람들을 위해 시간을 비워두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PD는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누군가의 이야기를 위한 자리를 비워두는 자다. 자기의 자의식을 지우고 방향을 지우라는 게 아니다. 들리는 대로 담지 않으려 애쓰는 태도가 필요하다. 목소리가 크고 힘이 센 사람의 목소리는 더 잘 들리고, 더 잘 실린다. 애써 고르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나 주류의 목소리만을 담게 될 뿐이다. 남의 말을 경청하기 위해 엉덩이를 자주 떼고 바삐 움직여야 한다. - 180p


  어린 시절 좋아했던 교양 프로그램들은 내가 몰랐던 세계가 여기 있다는 사실들을 알려 줬다. 그 프로그램들이 아니었다면 영영 몰랐을 세계들을. 쓰레기가 된 옷들이 어디로 흘러가 쌓여 있는지, 버스를 타지 못하는 장애인들이 어떻게 자신의 집에 고립되는지, 얼마나 많은 빙산이 녹아내리고 숲이 불타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열악한 노동 조건에 신음하는지, 편안한 소파 앞에 앉아 바라보는 세상은 얼마나 좁은지 알려주는 이야기들이 좋았다. 그래서 이 일이 좋았다.
  하지만 정작 일하면서는 이 장르의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고 있음을 느꼈다. 우리는 다소간 모호했다. 세상에 대한 해상도를 높이고, 세상을 달리 보이도록 하는 게 교양의 자리라는 생각이 나만의 착각이었던 건 아닌가 싶을 떄가 늘었다. 이 자리를 지켜내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밀도 낮은 정보들을 생산하는 데 몰두하는 모습에 혼란스러웠다.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이유로 계속 '당의정'을 입히는 데에만 집중하는 태도들이 어색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프로그램들이 왜 '교양'이어야 하는지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 227p


  문제는 영상을 만드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영상을 통해 말해야 하며, 말로써 남겨서는 안된다는 기묘한 의식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상 무엇이 말해지고 또 무엇이 남느냐는 자신들의 통제 범위 바깥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신은 모든 것을 손에 쥔 것 같은 태도로. ... 영상에 모든 것을 내던졌다고 해더라도 제작자는 거기에 대해 언제나 말할 것이 남아 있다. ... 특히나 자신들의 독해를 언제나 옳은 것으로 여기고 유지하는 유독한 독자들의 세계가 되어 갈수록, 해석에 대한 권한을 온전히 독자의 것으로 남겨 둬선 안된다는 것이다." - 280~28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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