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그를 처음 본 건 내가 열여덟 즈음이었던 것 같다.
한창 이성에 관심을 갖기 시작할 법한 나이였지만 그때의 나는 남자들은 왜 이리 유치하게 노는 가에 더 초점이 맞춰져서 이성보다는 다른 것에 빠져지냈던 시기.
한국인들에게서는 쉬이 볼 수 없는 hairy 한 그.
엄청나게 까맣고 길고 숱이 많은 털들은 사실 이성이 아닌 지인이라서 전혀 개의치 않았었지만 내가 만약 이성으로서 그를 대했다면 이 점은 꽤나 높은 진입장벽이 되었을 터였다.
15년 만에 연락이 닿고 얼굴이나 보자 해서 만난 첫날.
기억 속의 모습에서 그 hairy 함은 빠져있었기에 그날의 가장 큰 인상은 ‘아 맞다. 엄청난 털의 소유자였지’였다.
물론 내가 알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기도 해서 반갑기도 했고, 좀 더 어른스러워진 모습에 편안하기도 했다.
마음을 세련되게 표현하지 못할 나이인 열아홉 스무살의 그가, 실은 좀 부담스럽기도 했는데, 지금은 변죽이 좋아져서인지 꾸준히 자기 마음을 표현하는데도 여유도 보이고 편하기도 하다.
내가 첫사랑이라고 말하는 그는
스탠다드가 그냥 나라고 했다.
그냥 내가 하는 행동, 외모, 성격, 취향 모든 것이 다 좋아 보였다며, 다듬어지지 않았을 당시의 나의 독설로 본인은 많이 바뀌었다고도 했다.
그저 옛 생각이 나기도 했고, 이혼 한 마당에 이제는 친구라도 여럿 친하게 지내야 노후가 외롭지 않겠지 라는 마음으로 연락하고 만났던 건데 여전히 나를 좋게 봐주고 심지어 내가 받은 상처도 위로해주니 점점 마음이 열릴 수밖에 없었다.
-아기 공룡에 나오는 도우너 같아.
“악. 근데 반박할 수가 없잖아.“
도우너가 날이 갈수록 멋있어 보이는 건
요즘 애들 말로 필터가 껴진 건가.
사람에게 어떠한 감정이 생기면 지극히 주관적으로 보게 된다.
정말 비슷한 취향이었던 건지, 내가 좋아하는 걸 좋아하고, 나도 그가 좋아하던 것들에 영업당하고 그렇게 비슷한 걸 좋아했었는데 그동안 잊고 지냈던 것들을 하나씩 그를 통해 재발견했다.
그러는 동안 그에 대한 것들도 재발견하게 되었다.
안경 벗은 모습이 좋다.부터 시작하여 좋은 점들을 찾아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심지어는 단점으로 보이던 것들도 이제는 괜찮아지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리고 내 기억 속의 그보다 사실은 더 좋은 사람인 걸 깨달아 가고 있다.
-그래서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나랑 하고 싶은 게 뭔데?
“음. 하고 싶은 거야 많지. 근데 아침에 같은 침대에서 일어나고 싶어. “
-뭐야 그 말의 의미는?
“음. 그러려면 결혼을 해야겠지 않아?”
결혼.
이미 한번 경험한 나로서는 그저 족쇄에 불과했던 그것.
애가 셋이나 있고 그중 딸을 양육하고 있는 나에게는 꿈도 안 꿔본 그것.
둘만의 문제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공동의 문제가 되어버리는 복잡한 제도.
내가 그걸 다시 할 수 있을까?
“네가 원하지 않으면 결혼이 아니어도 상관없어. 그냥 내가 바라는 걸 물었으니까 대답한 것뿐이지. 그냥 네 옆에 있고 싶어.”
이런 조건 없는 감정 앞에 덤덤할 수 있을 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