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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국변호사 Violett Sep 29. 2023

계속 승진해야 하는 이유를 깨달았다

나도 이제부터 정치적으로 살아보기로 했다


"회사에서 정치를 해? 일만 잘하면 되지." 라며 사내 정치를 하는 사람들을 비판했다. 사내 정치는 옳고 그름의 영역이 아니라 직원 개인의 선택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내 정치를 하기 싫다는 이유로 사내 정치하사람들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일만 잘한다고 정말 다 되는 걸까? 승진에 욕심 없이 정년까지 다니는 것이 목표라면 사내 정치를 안 해도 상관없겠지만, 지금 하는 직무가 아닌 다른 직무를 하게 되어도 또는 다른 팀으로 갑자기 전배 되어도 괜찮다면 상관없겠지만, 하고 싶은 직무를 계속하고 싶고 승진도 하고 싶다면 일만 잘한다고 모든 게 다 잘 되지는 않을 것이다. 주니어 때야 일만 잘하면 되더라도 연차가 올라갈수록 윗사람들 그리고 동료들과의 관계에도 신경을 써야 뒤처지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까지는 다 아는 얘기였다. 동기들보다 승진이 밀려서 뒤쳐지기 싫다는 이유로 이직을 했고 능력과 무관하게 선배라는 이유로 하는 잔소리를 더 이상 듣기 싫어서 빨리 승진하고 싶었으니까. 나보다 윗 직급을, 선배와 동료들을 의식했다. 무조건 앞서나가고 싶다는 욕심은 아니었다. 모두 제 때 승진하는데 나만 못 하는 것이 부끄러우니까, 그리고 능력이 없는 선배가 소위 말하는 꼰대행세를 하는 것을 보기 싫으니까, 본질적이고 거창한 이유가 아니라, 그런 일차원적인 이유 때문에 빨리 올라가고 싶었다.


최근 잦은 조직개편과 인사발령을 겪으며 회사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 올라가야 하는 이유 하나를 더 알게 되었다. 제 때 승진하지 못하면 후배들이 또는 능력 없는 동료들이 치고 올라올 수도 있다는 것. 대리에서 과장으로 진급할 때일 수도, 부장에서 임원으로 승진할 때일 수도 있다. "임원 되면 더 힘들어지잖아, 난 부장으로 다니는 게 더 편하고 좋아"라며 만족했다 하더라도 막상 후배가 또는 능력 없는 동료가 임원으로 승진해서 나의 상사가 된다면, 그러면 계속 마음이 편할 수 있을까?


난 편하지 못할 것 같다. 정말 솔직히 말하면 비슷한 연차의 동료가 나보다 앞서나갈 때, 그 동료가 다른 팀이라 하더라도 마음이 불편했었다. 그리고 그 동료가 능력이 아니라 정치로 올라갔을 때엔 더 기분이 나빴다. 회사에 서운해하는 것이 부질없는 것이란 걸 알면서도, 능력보다 정치력을 더 높이 평가하는 회사에 실망도 했다. 사회적 가면을 쓰고 정치를 해서 인정을 받은 것도 그 사람의 능력인데 그건 능력으로 인정하지 못했다.


어차피 회사원으로 회사생활을 할 거라면 그동안에는 회사의 생리에 나를 맞추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걸 후배들에게 강조하면서도 정작 나는 나의 성향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맞춰야 하는 회사의 생리를 취사선택하고 있었다.



팀장이 되고 임원이 되는 것이 두려웠다. 당장 누가 나한테 팀장 하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혼자 상상하며 지금이 편하다고 이 정도가 딱 좋다고 안주하고 싶어 했다. 더 많은 일을 책임지고 더 많은 사람을 매니징하고 코칭하는 걸 내가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예상하기 어려운 수많은 리스크에 내던져져서 팀과 나 자신을 잘 지켜낼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단단하게 일할 용기가 필요할 때면 꺼내보는 책엔 이런 문구가 있었다.

"여성들이 높이 올라가는 걸 꿈꾸지 않는 이유가 정말로 실무를 너무 좋아해서일까? 재미있는 현업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워서일까? 큰 기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쉽고 안전한 테두리 속으로 스스로를 제한해 온 건 아닐까? 거꾸로 남자들이 자기는 어느 직급 이상은 승진하지 않을 거라고 선을 긋는 경우는 없다. 많은 회사의 성비를 보면 사원, 대리급은 여성이 수두룩하지만 팀장, 임원으로 올라갈수록 여성의 비율은 점점 줄어든다." p.59, <사랑한다고 말할 용기>, 황선우


책을 처음 읽을 승진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기 때문에 위의 문구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는데, 사실 또한 팀장급 이상은 승진하지 않을 거라고 선을 그은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얼마 전 상사가 나와 다른 동료를 부르시고는, 너희도 언젠가 팀장이 되어야 하니까 지금부터 미리 준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난 아직 팀장이 되기는 싫다고 준비가 덜 되었다고 말했다. 이 회사에서 팀장을 한다는 것은 수많은 적들에 둘러싸여 팀을 방어해야 하는 것과 사내 정치의 판에 온전히 내던져진다는 것도 의미했기 때문에 그걸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혼자서 외롭게 해내야 하는 그 싸움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 나의 옆에 앉아있던, 나에게는 팀장 욕심이 없다고 했던 그 남자 동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그 웃음을 보는 순간 내가 괜한 말을 했구나 싶었다. 황선우 작가님이 책에서 쓴 얘기가 이런 거였구나. 저 사람은 자신의 능력과 상관없이 선을 긋지 않는데 난 혼자서 선을 그어버렸구나. 그의 웃음을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 사람이 내 상사가 되는 걸 보느니, 그런 상황이 실제로 생겨 어쩔 수 없이 퇴사하는 날을 마주하게 되느니, 내가 올라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22년 MBC 연예대상 시상식에서 이경규 님은 공로상을 받고 말했다. "많은 분들이 이야기합니다. 박수 칠 때 떠나라고. 정신 나간 놈입니다. 박수 칠 때 왜 떠납니까? 한 사람이라도 박수를 안 칠 때까지, 그때까지 활동하도록 하겠습니다." 당시 TV를 보며 이 말에 감동을 받았었는데,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이경규의 문장을 회사원으로 치환해 보면, 높은 자리에 올라갔을 때 퇴직하는 것이 아니라 임금피크제를 거쳐 정년이 될 때까지 회사에 다니다가 정년 퇴임하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닐까. 난 어느 것을 더 원할까?


어느 행사에서 로펌에 재직 중이신 파트너 변호사님(회사에서는 임원급)의 스피치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Women Lunch라고 여성 변호사들이 모여 함께 점심을 먹는 자리였고 그 변호사님은 자신의 커리어 스토리를 말하는 중이었는데 너무 기억하고 싶은 문장들이 많아서 밥을 먹다 말고 메모장을 켜서 받아 적었다. 마음에 제일 와닿았던 말은, "이왕 할 거면 파트너 변호사까지 하자"라고 생각했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너무 단순했다. "Why not?" 


회사원으로 끝나는 커리어패스를 생각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회사에서 팀장까지, 임원까지 올라가는 것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회사에 한동안 다닐 거라면 어느 직급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 올라가야 하는 이유를 깨달았다. 그리고 그러려면 실력과 외에도 정치력이 필요하다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임금피크제를 두려워하지 않고, 정년퇴임하는 것 말고, 내가 있고 싶은 자리에서 하고 싶은 일을 기획하고 추진하다가 더 좋은 자리로 가는 것을, 만약 더 좋은 자리가 없다면 최고의 위치에서 회사를 당당하게 떠나는 걸 하고 싶어졌다. 아무도 박수 치지 않을 때가 아닌, 이왕이면 박수갈채를 받으며 떠나고 싶어졌다. 그리고 떠나기 전에, 능력 없이 정치로만 위로 올라가는 사람을 막아버리고 실력을 갖추어서 내가 그 자리에 있고 싶어졌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이제 나도 회사에서 정치적인 생활을 한 번 해보려고 한다.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쉬운 것 먼저 차근차근. 웃기 싫을 때 웃고 싫은 사람에게 싫어하는 티 내지 않고 공감이 하나도 되지 않아도 그래 그럴 수 있지라고 하는 것. 이게 내가 생각하는 정치력 발휘의 시작이다. 이 정도는 나도 할 수 있겠지. 그리고 하다 보면 조금 더 어려운 다음 스텝도 밟을 수 있겠지. 그렇게 실력과 정치력을 발휘하면서 갈 수 있는 만큼 더 높이, 더 멀리 가보려고 한다. Why n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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