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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센토 Oct 12. 2022

갈림길에서

@ 경태


어색한 포즈로 버스가 멈춰섰다. 우리가 가야 하는 길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높은 돌담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말 그대로 길이 사라졌다. 다행히 한참 동안 지도를 들여다보던 운전 기사는 돌아가는 루트를 발견했다. 모두 장시간의 버스 여행에 지쳤지만, 잠시 바깥 바람을 쐰 뒤 다시 차에 올랐다. 


지도에선 낯선 지명의 두 지점을 연결하는 꼬불고불한 선이었던 그 길 위에 저녁이 내렸다. 달리는 차 안에서 뒤를 돌아보았다. 마치 다신 되돌아오지 않을 순간들을 맘 속에 새기려는 듯 차창 밖으로 흔들리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살다가 한번 밖에 만나지 못하는 삶의 장면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된 나이가 되었다. 또한 그 사실을 매일 잊어버리고 사는 나이가 되기도 했다.




어쩌다 한, 두편의 글을 쓸 수는 있다. 하지만 책을 만드는 것은 또 다른 일이다.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하는지는 각자가 풀어내야 할 미스터리이겠으나, 여하튼 어떤 이들은 방랑벽이 도져 낯선 길을 헤매듯이, 악령에 씌여 어둠 속을 떠돌듯이 외롭고도 고된 방황을 시작한다.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는 채. 마치 떠나는 것이 떠남의 유일한 목표*라는 듯이. 


일시적인 충동이나 누군가의 꼬드김으로 길을 떠날 순 있으나, 더 큰 문제는 길 위에서 일어난다. 길을 떠난 이유는 얼마 가지 않아 희미해진다. 길 위에서 떠나온 집은 무척 아늑했던 듯 느껴지고, 남은 길은 그저 막막하기만 하다. 무엇보다 길을 잃거나 갈림길을 만났을 때는 말해서 무엇하랴. 길 위에서 만난 친구들도 떠나고 벼랑에 서서 "떠나온 이유를 물어야" 할 때도 있다. 


"별을 따러 떠난 길에 만난 해마와 불가사리. 나는 해안 절벽 끝에 가보고 싶어 멈춰야 했어. 갈림길에서, 저녁 배로 떠나겠다는 선선한 웃음, 불가사리에 붉은 노을이 어리어 나는 악수를 청해야 했었지. 해마에게는 어색하게 설익은 과일을 하나 따주었어. 벼랑에 올라보니 농익은 하늘이 지천이었고 서글픔이 절벽을 치고 있었어. 나는 꼼짝없이 서서 떠나온 이유를 물어야 했어." **


많은 이들이 이쯤에서 발길을 돌리곤 한다. 그런 마음 약한 우리들에게 옛 선인(先人)들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옛날 어떤 마을에 인색한 장자가 살았다. 어느 날 한 스님이 그 집을 찾아와 시주를 청하자 장자는 바랑에 두엄을 퍼 넣고서 스님을 내쫓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장자의 며느리는 남 몰래 쌀을 퍼 가지고 스님을 따라가서 시주를 드리며 잘못을 사죄했다. 스님은 며느리를 물끄러미 보더니 뜻 모를 말을 남겼다. “지금 바로 길을 떠나서 저 산마루를 넘어가시오. 어떤 일이 있어도 뒤를 돌아봐선 아니 되오.”


며느리는 스님이 말한 대로 집을 나서서 산마루를 향했다. 그가 고갯길로 올라서서 산마루를 넘어서려는데 뒤에서 세상이 무너지는 요란한 소리가 났다. 그 순간 며느리는 스님의 말을 어기고 뒤를 돌아보았다. 보니까 장자의 집이 함몰되어 물바다가 되고 있었다. 뒤돌아 그 모습을 본 며느리는 그 자리에서 돌이 되고 말았다. 그때 장자의 집이 가라앉으며 생긴 연못과 며느리가 변해서 생긴 바위가 아직도 마을에 남아 있다." ***


<장자못 전설>로 알려진 위의 이야기는 여러 시대와 여러 지역에서 반복되어 나타나는 원형적인 패턴이다. 가령 성경에는 소돔과 고모라에서 탈출하던 롯의 아내가 천사의 경고를 어기고 뒤를 돌아보아 소금기둥이 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처럼. 이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이런 메시지를 전한다. '뒤돌아보면 죽음이다!' 길을 나선 뒤에 뒤돌아보면 더 큰 화가 닥친다. 길을 떠난 이상 눈을 질끈 감고 저 산마루를 넘어서야 한다.


어찌 떠나온 곳에 대한 미련이 없겠는가 마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더 이상 되돌아갈 곳은 없다. 마치 <반지의 제왕>에서 프로도 배긴스가 반지 원정대와 함께 길을 떠난 이상, 자신의 임무를 완수한 뒤에야 샤이어의 호빗 마을로 다시 돌아올 수 있듯이. 길을 나선 이들은 언제나 장벽이나 갈림길을 만나게 마련이다. 그것은 때때로  무서운 얼굴을 하기보다는 나약한 마음을 가장한다. 오늘은, 내일은... 그렇게 우물쭈물하다 어느새 날은 저문다. 


그러니 아마도 길을 떠난 이의 유일한 행동 강령은 묵묵하고 조용하게 오늘의 길을 걷는 일일게다. 투덜대지 않고 오늘 자신이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쓸 수 있는 글을 쓰는 것. 그 뿐이다.



‘어딜 가십니까, 주인어른.’ ‘모른다.’ 내가 대답했다. ‘그냥 여기를 떠난다. 그냥 여기를 떠난다. 그냥 여기를 떠나 내처 간다. 그래야 나의 목표에 다다를 수 있노라.’ ‘그렇다면 나리의 목표를 알고 계시는 것이지요?’ 그가 물었다. ‘그렇다.’ 내가 대답했다. ‘내가 여기를 떠난다고 하지 않았느냐? 떠남이 나의 목표니라.’ 주인어른께서는 양식도 준비하지 않으셨는데요.’ 그가 말했다. ‘나에게는 그 따위 것은 필요없다.’ 내가 말했다. ‘여행이 워낙 길 터이니 도중에 무얼 얻지 못하면 나는 필경 굶어 죽고 말 것이다. 


프란츠 카프카, <돌연한 출발> 


** 이수정, <갈림길>


*** 신동흔, <삶을 일깨우는 옛 이야기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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