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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센토 Oct 14. 2022

어떤 노래

@ 선운사


나뭇가지 사이로 햇살이 스며들고, 귓가에 기분 좋은 바람이 스쳐간다. 저 멀리 폭신한 목화솜 같은 구름이 흘러가는 풍경 아래 누워 책을 읽다가, 깜빡 잠이 들었던가. 어느새 방향이 바뀐 햇살에 눈이 부셔 잠을 깨면, 누군가 나를 들여다보고 있다. '클리나멘Clinamen이 돌발한다.'


‘넌 누구니?’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킨다. 여전히 푸른 하늘에는 구름이 떠가고 잠시 시간이 멈춘듯한 봄날의 오후, 눈을 떴다. 그리고 모든 것은 시작되었다. 다시 처음인 듯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어떤 노래*가 흘러 나왔다. 




시간이란 무엇일까? 그리스 신화는 ‘시간’을 뜻하는 크로노스(Cronos)의 잔인한 이야기와 함께 시작한다. 태초에 혼돈이 있었다. 하늘의 신 우라노스(Uranos)는 땅의 여신 가이아(Gaea)와 결혼하여 수많은 자식 - 거인들(Titans)을 낳는다. 가이아는 자꾸 아이를 낳게 하는 남편에게 불만을 품고 막내 크로노스의 손에 낫을 쥐어 주었다. 크로노스는 다시 우라노스가 가이아를 덮쳤을 때 낫을 휘둘러 아비의 생식기를 베어버렸다. 그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흘러 시간이 되었다. 


이후 크로노스는 아이가 자라 자신을 죽일 것을 염려하여 자식이 태어나자마자 집어 삼켜버렸다. 고야가 그린 자신의 아이를 뜯어 먹는 크로노스의 잔혹한 그림을 본 적이 있으리라. 이는 시작하자마자 끝을 향해 달려가는 무심하고 무자비한 시간의 물리적이고 절대적인 속성을 뜻한다. 중세에 만든 유럽의 해시계에 새겨진 라틴어 문구처럼, 시간은 상처를 입히고, 마지막엔 죽인다(Vulnerant omnes, ultima necat). 


아무도 시간을 멈출 순 없다. 우리의 육체는 크로노스의 물리적 시간과 함께 무너져 갈 뿐이다. 이리 생각하면 쓸쓸하고 허무하기 그지 없는 일인데, 시간을 뜻하는 또 다른 단어가 있다. 바로 카이로스(Kairos)이다. 크로노스가 기계적이고 연속적으로 흐르는 물리적인 시간을 의미한다면, 카이로스는 보다 짧은 순간이나 ‘심리적’ 시간을 뜻한다. 카이로스는 ‘기회’를 뜻하기도 하는데 후대의 그림이나 조각에서 그리스 신화 속 카이로스는 앞머리는 길지만 뒷머리는 없는, 양발에도 날개가 달린 천사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여기에는 기회의 앞머리를 재빨리 낚아채지 않으면 순식간에 사라져버려 두번 다시 붙잡을 수 없다는 은유가 담겨있다.  


예로부터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버리는 기회의 신 ‘카이로스’를 잡기 위한 여러가지 방편이 고안되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쾌락주의”이다. 기원전 4세기에 시작된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는 우리가 아는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라는 대표되는 육체적인 쾌락과는 약간 결을 달리한다. 오히려 ‘마음의 평화’를 강조하는 현대적인 시간관에 가까운데 ‘카르페 디엠 Carpe diem _오늘을 잡아라’이란 호라티우스의 시구로 잘 알려진 이 고대 철학은 21세기에 이르러 ‘소확행’, 욜로(YOLO)’ 등의 키워드로 요즘 세대의 행복관이자 대중 문화의 핵심 코드로 급부상했다.


“모든 일은 그대가, 곧 오늘 여기에 살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그대가 행복하게 산다는 데 달려 있다. 그대는 신이나 그의 사원을 위해, 국가나 강력한 문화를 위해 (신이나 사원을 ‘직장'으로 바꿔 읽어도 좋으리라)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그대의 단 한 번뿐인 유일한 인생을 행복으로 가득 채우기 위해 존재한다.” 놀랍게도 이는 최근의 베스트셀러나 행복에 관한 에세이의 주제가 아닌 기원 전의 철학자 에피쿠로스의 가르침이다.


철학자 김용규는 현대에 다시 에피쿠로스의 철학이 부활한 이유는 바로 신은 죽어 세상의 기본적인 가치 판단의 기준이 사라지고, 신자본주의의 전지구적 확산으로 최소한의 양심과 윤리도 사라져버린 불확실하고 무자비한 세상에서 견디고 버텨내기 위한 심리적 동아줄과 같은 것으로 파악한다. 삶은 두려운 것이다. 죽음 또한 두려운 것이다. 그나마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오늘, 바로 지금, 바로 이 순간 뿐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시간을 대하는 데에는 두가지 선택지 밖에 없는 것일까? 태어나자마자 지옥행 급행 열차에 올라탄 듯 크로노스라는 무자비한 시간에게 멱살을 잡힌 채 질질 끌려가거나 “산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이시오? 허리띠를 풀고 말썽거리를 만드는 게 바로 삶이오”라고 외치는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오직 현재에 충실하며 어제와 내일을 잊은 채(혹은 잊으려고 노력하며) 사는 것. 


물론 선택은 각자의 몫이지만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_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의 라틴어는 또 다른 삶의 가능성을 시사해준다. ‘죽음을 기억한다면’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의 삶이 아무런 의미나 가치도 없이 사라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보통 이런 것들을 인생의 소중한 의미로 여긴다. 가족과 사랑하는 이들과의 친밀한 관계. 자신이 이루거나 성취한 것들. 자식이나 후대를 위한 유산과 공헌. 신과 종교와 영성의 추구 등등. 


나바호의 인디언들은 이것을 보다 이해하기 쉽게 말한다. “네가 세상에 태어날 때 너는 울었지만 세상은 기뻐했으니, 네가 죽을 때 세상은 울어도 너는 기뻐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라.” 아마도 좋은 삶이란 “세상은 울어도, 나는 기뻐할 수 있는” 그런 가슴 후련한 삶이리라. 사는 동안 나는 어떤 노래를 부르게 될까? 




* "아카디가 오스트레일리아 전역에 굽이쳐 퍼진 눈에 보이지 않는 미로 같은 길에 대해 알게 된 것은 교사로 일할 때였다. 유럽인들에게 이 길은 '꿈의 자취' 혹은 '송라인(Songlines)'이라 알려져 있다. 애버리지니는 이를 '조상들의 발자취' 혹은 '법의 길'이라 불렀다." - 브루스 채트윈, <송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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