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내고 훌쩍 떠난 미디어아트 순례기
The journey of media art
Jaegg, 2019
내가 대만에서 한 일은 매일 매일 잠들기 전 일기를 쓴 것이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주로 잠들기 전이였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때론 무의미하게 밖을 설렁설렁 돌아다니다가 밀크티를 한 잔 사온 늦은 오후에 쓰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중요한 건 이곳에서 다시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20일 동안 나는 오래된 중국식 호텔방에 머물렀습니다. 호텔에는 접견실처럼 생긴 테이블이 있었고, 그 위에는 초록커버가 달린 엔틱한 스탠드등이 있었습니다. 어쩐지 고적한 그 등의 생김새가 매우 마음에 들었습니다. 등의 스위치를 껐다가 켰다가를 한참 반복했습니다. ‘딸깍 딸깍’ 소리가 적막한 방의 유일한 소리였죠.
나는 무슨 글을 써야만 하는걸까. 왜 글을 쓸까. 쓰고는 싶은걸까, 써야만 살아갈 수 있는걸까. 머릿 속에는 여러가지 질문들이 늘 가득 차있습니다. 꽉 막힌 실타래를 풀기 위해 일종의 의식처럼 피트니스센터로 향합니다. 런닝머신 위에 달린 텔레비전은 마치 1980년대 백남준의 작품에 쓰였던 것처럼 오래된 구형 뚱뚱이 모양입니다.
여름의 끝자락, 늦은 휴가를 얻어 저는 베를린에 있었습니다. 마침 일 년에 한 번있는 베를린 아트위크였고, 도시 곳곳에 예술가들이 많이들 모여있었습니다. 그 안에서 저는 백남준 비디오아트 회고전 <Media Magic>에서 그의 작품을 보며 경탄을 하고 있었습니다. 넘쳐나는 온 세상의 아티스트 중에, 지금 세상에 없는 그는 개막전을 차지했습니다. 원래도 진지한 독일인들은 더욱 더 진지한 표정으로 (독일어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아마도) 여전히 그의 의의를 찬양하며 기념하고 있었습니다. 오랜 시간동안 그곳에 머물며 그의 작품, 아이디어 스케치를 염탐하듯이 탐닉했습니다. 내 안에서 감탄, 질투, 동경, 번뇌 같은 여러 감정들이 뒤섞여 꾸물거렸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미디어아트 순례를 훌쩍 떠나왔습니다. 세계 최고의 미디어아트 페스티벌 아르스 일렉트로니카가 열리는 오스트리아 린츠를 필두로, 유럽 미디어아트의 허브 ZKM이 있는 독일 카를스루에, 베를린의 세계가전박람회 IFA와 아트페어를 다녀왔습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15일간의 여정에서 저는 꽤나 자주 스탕달신드롬*을 느꼈습니다. 아주 큰 일을 겪게 되면 오히려 현실감 없이 아득히 느껴지곤 하듯이, 모든게 아주 오래된 일처럼 까마득합니다. 실타래를 하나씩 풀어내다 보면 조금은 개운해질까-라는 순진한 희망을 오늘도 가슴속에 품어보면서,
*Stendhal syndrome; 뛰어난 예술작품을 보았을 때 순간적으로 느끼는 각종 정신적 충돌 혹은 분열
내가 사랑하는 라벨의 어미거위 5번 요정의 춤이 흘러나왔다. 베스트 스탕달신드롬의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