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후기, 그리고 카를스루에궁전 프로젝션맵핑 페스티벌의 현장
독일 미디어아트의 허브에서는 어떤 전시가 펼쳐지고 있을까요? 제가 찾았을 때 ZKM은 메인전시관과 특별관 두 곳의 전시공간이 오픈되어 있었습니다. 그 외의 세미나실, 공연장등 숨겨진 멋진 공간들이 많다고 합니다.
(공간에 대한 이야기는 전편을 참고해주세요.)
미디어아트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백남준의 비디오아트부터 건물 벽을 수놓은 휘황찬란한 프로젝션 맵핑, 그리고 최근엔 AI 아티스트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지만, ZKM은 그 중 특히 미디어아트의 전통을 중요시하고 있었습니다.
메인전시관에서는 개관 30주년전으로 미디어아트 회고록이 펼쳐졌습니다. 20, 21세기 미디어아트의 시초라고 볼 수 있는 시기의 다양한 작품 500여점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키네틱아트, 사운드아트, 비디오아트, 가상현실, 홀로그램, 필름, 사진 등 기술과 예술이 융합되어 시도된 전방위적의 작품들을 카테고리별로 살펴볼 수 있었어요.
혁신성이 가장 큰 특징인 미디어아트 전문 센터의 30주년 기념전이 다시 과거로의 회귀인 회고전이라니. 문득 기획의도가 궁금해졌습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왜 이곳이 미디어아트의 허브가 되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습니다. 방대한 작품들이 끊임없이 시도되는 곳, 그럴 수 있는 인프라와 휴먼리소스. 그렇게 쌓인 100여년의 역사. 이 모든 것들이 모여 깊은 아우라를 만들어낼 수 있었겠지. 라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회고전을 꼼꼼히 둘러본 후, 특별관으로 이동했습니다. 카를스루에 예술대학교 캠퍼스 2층에 위치하고 있던 특별전 <Out of Edge>에서는 예상 밖의 정말 특별한 일을 겪게 되었습니다.
전시장에 가까워질수록 아무도 없는 텅빈 복도에 나지막한 한국어가 또렷하게 들렸습니다. 저는 처음에 한국인 관광객인가?라고 생각하며 내심 반가운 마음에 걸음을 재촉하여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아니, 웬걸? 바로 김희천 작가의 비디오아트 작품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였습니다.
순간 허탈한 웃음이 감출새도없이 '파-!'하고 터져나왔습니다.
더 큰 세상의 흐름을 좇기 위해 이 멀리까지 왔는데, 예전에 과천 현대미술관에서 본 작품을 다시 만나게 되다니. 주변의 인프라가 부족함을 탓하곤 했던 저의 마음가짐이 참으로 민망했습니다. 그래, 현재 나의 자리에서도 충분히 잘 해나갈 수 있다고 믿어보기로 했습니다.
전시 소개로 돌아가자면,
<Edge of now> 는 젊은 미디어 작가를 소개하기 위한 프로젝트로 한국의 백남준 아트센터, 중국 상하이 CAC, 독일 ZKM의 후원 아래 진행된 그룹전입니다. 한국의 김희천, 중국의 양지안, 독일의 베라나 프리드리히 이렇게 3명의 젊은 작가가 참여했습니다.
각 작가는 뚜렷한 특색으로 각각 3개의 방을 꾸며두었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영상을 담은 비디오아트, 디지털 정원 등을 보고있으면 너무나 충실한 그들의 삶에 대한 자세와 세상에 대한 순수한 외침 덕에 마음이 울려왔습니다. 최근 봉준호 감독의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라는 말이 이 곳에서도 실현되고 있었습니다.
1년에 딱 한 시즌, 여름밤이 되면 조그만 도시 카를스루에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해집니다. 바로 밤에 펼쳐지는 카를스루에궁전 페스티벌 때문입니다. 도시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궁전에 프로젝션매핑을 수놓는 장관이 펼쳐지는데요. 카를스루에 시와 ZKM같은 지자체 공립기관과 하이네켄같은 사립기관의 후원으로 매년 8~9월 한 달간 진행된다고 합니다.
마치 단편영화 축제처럼 약 2시간정도 여러 작가들의 작품이 상영됩니다. 보통 야외 프로젝션맵핑은 한 장소에 하나의 컨텐츠를 만들어서 반복적으로 틀어주어 상징적인 장소로 만드는데 목표를 두곤하는데, 축제의 특성상, 같은 장소에서 각자 다른 컨텐츠들이 재생되어서 작가별로 어떻게 맵핑기술을 이용했는지 비교하면서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였습니다.
트램을 타고 ZKM에서 카를스루에 궁전으로 향하는 길, 낮까지 조용하던 동네가 갑자기 북적여진 느낌이 듭니다. 젊은 학생들부터 나이 지긋하신 분들까지 손에 돗자리며 먹을거리를 잔뜩 들고 설레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눕니다. 궁전이 한 눈에 보이는 잔디정원에 도착한 순간, 말로 할 수 없는 행복감이 차올랐습니다. 자유로이 잔디에 드러누워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공연 옆 한 켠에서 풍겨오는 맛있는 소시지 향기.
하나라도 놓칠세라 전시에 집중한 탓에 약간의 부담 속에서 여행을 마냥 즐기지는 못하고 있던 저였지만, 도란도란 모여 맥주를 마시며 공연을 즐기는 사람들을 보니 저도 이 순간을 마음껏 즐기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여름밤의 궁전 앞에 앉아, 맥주 한 모금에 소시지 한 입 그리고 미디어아트. 명색이 미디어아트 순례기를 떠나온 제게 이 페스티벌을 필수 코스였기에, 다소 무리한 일정을 강행한 보람이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무언가 거창하지만 뭔지 모르겠는, 그런 예술이 아닌 이렇게 퇴근 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도란도란 즐기는 친근한 미디어아트 인프라가 더욱 늘어났으면 하는 작은 소망이 마음 속에 생긴 카를스루에에서의 굵고 짧았던 하루의 여정이었습니다.
참고자료:
경기문화재단 ZKM Edge of now https://www.ggcf.kr/archives/110702
카를스루에궁전페스티벌 2019 https://zkm.de/de/ausstellung/2019/08/schlosslichtspiele-2019
카를스루에페스티벌 2019 영상 https://youtu.be/ylQS8KnjTU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