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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란 Dec 10. 2019

햇빛이 빛나는 오늘

햇님이 아닌 햇빛

햇빛과 햇님

창조세계가 창조주를 잃어버린 이후에 벌어진 수만 가지 방황 중에서 최고의 방황은 바로 피조물을 신격화하는 행동인 것 같다. 사람은 물론이고, 소, 돼지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실상 모든 피조물이 바로 ‘신’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천체(天體: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물체)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대표적인 것이 지구에서 육안으로 쉽게 볼 수 있는 해와 달인데, 어린 시절 동네에 ‘햇님 유치원’을 보며 자란 탓일까. 왜인지 모르게 ‘해’라고만 부르면 밋밋하다. ‘햇님’이라고 불러야 맛깔나는 것이다. 언어는 한번 생성되면 소멸이 어렵고, 명칭이란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감성이 투영된다. 그렇게 ‘햇님’은 말맛이 나는 명칭이 되어 우리들의 입에서, 우리 어머니 아버지의 입에서 사랑받았고 또 우리가 자녀를 기르는 시기가 되었을 때 애용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현상은 비단 나만의 일은 아닌 것 같다. 언어와 문화가 가진 섭리를 앞서 꿰뚫고 있는 문화천재들은 한결같이 동화책에서 해와 달에 얼굴 표정을 그려 넣고 있다. 아기를 처음 롯데월드에 데리고 갔을 때 아기가 제일 재미있게 타서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는 놀이기구도 하필이면 ‘햇님달님’이어서 우연치고는 너무나도 긴밀하게 내 삶에 달라붙어 있는 그 ‘햇님’을 어린 아기를 키우는 동안에는 최선을 다해서 내 입에 올리지 않았다.



“햇님이 반짝반짝”은 “햇빛이 반짝반짝”으로 바꾸어도 무리가 없고, 아니면 “햇살이 반짝반짝”으로 사용하면 문학적인 느낌을 더할 수 있다.
어린 아기의 의식의 흐름은 생각보다 빠른 시기에 햇빛을 인식한다. 말을 시작할 무렵부터 햇빛에 대한 이야기를 하더니 (햇빛이랑 손 잡을래, 햇빛아, 내 무릎에 앉아, 엄마, 나는 햇빛이 좋아요. 햇빛이 따뜻하게 해주니까 고맙다. 등등) 최근들어, 어디서 들었는지 햇빛을 햇님으로 바꾸어 불렀다. 그냥 무난하게 넘어갈까 했는데, 순간 연달아 나온 말이, “엄마, 햇님속에 하나님이 계신 것 같아요. 햇님이 하나님 같아요.”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누가 가르쳐 준것도 아닌데 어쩌면 인간의 사고 흐름은 옛날 고대 태양신 숭배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리도 한결같은지! 감탄을 금치 못할 정도였다.



“ㅇㅇ야, 하나님은 태양속에 계신 게 아니야.”
“아니에요.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도 계시고 어디에나 계세요. 그러니까 태양속에도 계신거예요.”
“하나님은 태양속에 계신 것이 아니라 태양을 만드신거야. 해나 달뒤에 님자를 붙여서는 안돼. 하나님, 예수님에게 붙이는 거랑 똑같이 붙이는 게 아니고 나무나 돌을 만드신 것처럼 해도 하나님이 만드신거야.”
“네, 엄마.”



세계를 이해하는 커다란 뼈대가 갖춰지고 있는 시기를 살고 있는 어린 딸은 바로 수긍하고 받아들였다. 언어속에 흐르고 있는 중요한 관점을 갖춰가고 있는 딸의 하루하루, 한마디, 한번의 대화들이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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