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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욱 Jul 27. 2019

사라지는 것들에 대하여

대형마트 셀프계산대를 자주 이용한다. 사람을 대면하지 않고 혼자 계산하는 게 어느새 익숙해졌다. 그날도 셀프 계산을 마치고 나가려던 참이었다. 출구엔 검열대 두 개가 경찰마냥 근엄하게 서있다. 이상하게 검열대를 통과하기 직전엔 몸에 긴장감이 맴돈다. 지은 죄도 없는데 말이다. 삐-삐-삐! 갑자기 검열대가 온 몸으로 붉은 빛을 번쩍거리며 시끄러운 소리를 뿜어냈다. 분명 내가 지나가고 있었다. 삐-삐-삐! 변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울려댄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쳐다봤다. 직원은 위아래로 나를 훑더니 영수증을 달라한다. 실수로 계산을 빠뜨린 건가. 저 도둑 아니에요. 얼굴이 시뻘게졌다.      


중학생 때도 ‘계산’ 때문에 얼굴이 시뻘게진 경험이 있다. 중학교 후문에서 경사 높은 언덕으로 쭉 올라가면 낡은 슈퍼가 하나 나왔다. 간판에 ‘동네수퍼’라는 글자가 겨우 남아있던 슈퍼. 새우깡, 빠다코코넛이나 있을까. 한눈에 봐도 중학생이 좋아할만한 과자는 찾을 수 없어보였다. 그러나 이 슈퍼는 몇몇 중학생들이 암암리에 애용하던 곳이었다. 바로 할머니의 계산법 때문이었다. 이곳 주인 할머니는 거스름돈을 잘못 주는 경우가 많아 운 좋으면 과자도 얻고, 돈을 벌수도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고급 정보를 얻은 나 역시 동네수퍼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슈퍼에 들어가면 나프탈렌 향이 섞인 쾌쾌한 냄새가 났다. 할머니는 항상 안쪽 마루에 앉아계셨다. 몇 번의 이용 끝에 나는 소문이 진실임을 확인했다. 만원을 내고 만원 넘는 돈을 거슬러 받았다. 들킬까봐 서둘러 슈퍼를 나왔다. 드디어 성공이었다. 신나는 마음으로 집에 갔다.      


나는 엄마에게 거스름돈을 잘못 받아 돈을 벌었다고 자랑했다. 엄마는 당연히 혼을 냈다. 내일 당장 슈퍼에 가서 모든 걸 솔직하게 사과하라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당시엔 미필적 고의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 내가 나쁜 짓을 직접 행한 건 아니기에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어딘가 불편했기에 상황을 인정해줄 누군가가 필요했고, 그것이 엄마에게 자랑의 형태로 튀어나온 것이다. 돈을 번 것 같아 신났지만 불편함은 지울 수 없었다. 알고도 다시 돌려주지 않은 건 잘못이라는 엄마의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확인까지 하겠다는 말에 나는 슈퍼에 가 용서를 빌겠다고 약속했다.     


슈퍼 문을 열자마자 풍기는 쾌쾌한 냄새가 그날따라 더욱 지독했다. 할머니께 다가갔다. 얼굴이 시뻘게진 채로 어제 거스름돈 계산이 잘 못 된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쭈뼛쭈뼛 말을 이어나갔다. 사실 알고도 그냥 집에 갔어요.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였다. 혼날 차례였다. 그러나 할머니는 한마디 꾸짖음 없이 요즘 부쩍 계산을 잘 틀린다며 본인을 탓하셨다. 되려 내게 솔직하게 말해줘 고맙다고, 누구나 실수 하는 거라고 말씀하셨다. 고개를 들었다. 할머니는 내 눈을 바라보고 계셨다.     


대형마트 검열대가 삐-삐-삐! 울린 날 영수증과 상품을 비교해본 직원은 아무 이상 없다고, 가끔 검열대가 실수로 울린다고 말했다. 계속해서 힐끔힐끔 나를 쳐다보던 사람들 역시 더 이상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내가 계산을 하나라도 빠뜨렸다면 어떻게 됐을까. 누군가는 날 도둑으로 보지 않았을까. 직원이 영수증과 상품을 대조하는 내내 두려웠다. 검열대의 소음. 붉은빛의 깜빡거림. 영수증을 달라는 직원의 표정. 사람들의 시선. 그날 나는 내가 실수하지 않았음에 안도했다. 마트 직원에게 셀프 계산대의 계산법은 틀릴 리가 없었다. 검열대의 실수는 용서되어도, 나의 실수는 용서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날 나는 동네수퍼 할머니가 떠올랐다. 다분히 나쁜 마음을 먹고 할머니의 계산법을 이용한 나를 용서해준 할머니의 눈빛이 그리웠다. 내 잘못을 실수일뿐이라며, 다독여준 할머니의 마음이 그리웠다. 그 쾌쾌한 냄새가 그리워졌다. 15년이 지난 지금 동네수퍼는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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