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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미 May 12. 2021

공간에 대해서

바다에서 악기 연주하기

 신라시대 만파식적 전설로 유명한 경주 문무대왕릉 바닷가에서 리코더를 불어보기로 했다. 뜬금없이 무슨 바다 앞에서 리코더냐고 할 수도 있지만 그냥 아무도 안 할 것 같은 허무맹랑한 시도를 한 번쯤 해보고 싶었다. 물론 리코더만 불려고 이 먼 곳까지 온 것은 아니고 친구들과 여행 겸 이곳에 왔다. 사실 경주하면 불국사, 석굴암이 가장 먼저 떠올라서 바다가 있는지 몰랐다.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답게 바다도 그냥 바다가 아닌 전설의 바다였다. 만파식적 설화는 사후 바다 용이 된 문무왕과 하늘의 신이 된 김유신이 합심하여 신문왕에게 대나무를 내렸고, 신문왕은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불어 나라가 평온해졌다는 이야기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그런 유서 깊은 곳에서 리코더를 불게 되다니 나름 영광이었다.


 근데 왜 하필 리코더냐고 묻는다면, 바다 앞에서 마땅히 연주할만한 악기가 떠오르지 않거니와 중학교 때 나름 리코더부로서 악기를 다룬 경험이 있기에 골랐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화려한 연주는 불가하지만 그래도 동요 정도는 불러젖혀볼 수 있었다. 작열하는 8월의 태양 아래 파란 바다가 널찍하니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꽤 멀리에 문무왕릉처럼 보이는 바위 무리가 바다 위에 솟구쳐 덩그러니 존재감을 드러냈다. 여느 바다와 달리 누가 지켜보는 것 같은 느낌도 괜히 들었다. 부서지는 파도 앞에서 분홍색 리코더를 꺼내 가슴 앞에 가져다 대었다. 중학교 시절 알토 리코더의 포지션으로 교내 대회까지 나갔던 파란만장한 때가 떠올랐다.


 십여 년 전 기억을 더듬어 조심스레 리코더에 숨을 불어넣었다. 처음에는 삐-하고 음이 안정적으로 나오더니 금세 삐익! 하고 소리가 찢어졌다. 너무 오랜만이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냥 삑사리도 하나의 소리라 생각하고 연주를 시작했다. 도미솔도~ 도미솔레~ 도미솔 솔파미파 미레도~ 광활한 바다 앞에서 꽤 소박하고 초라한 음들이 흩어져 퍼지니, 머쓱함과 동시에 묘한 쾌감이 들었다. 뭐랄까, 내가 만든 소리가 어떤 방해물도 거치지 않고 팔방으로 나아가는 것에 대한 새로움이랄까. 허접한 소리는 어떠한 피드백도 없이 그저 대기 속에 용인되었다. 마치 군 시절, 막사 전체 물이 끊겨 멀리 임진강이 보이는 산 언덕 어딘가에서 볼 일을 보았을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좋은 예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공간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고만 생각한 행동을 그렇지 않은 환경에서 했을 때 묘한 해방감이 있다. 물론 평소에 그런 것들을 딱히 경험할 일은 없지만, 또 한 번 경험해보면 인간 중의 인간이었던 내가 잠시나마 자연 중의 인간이 되는 묘한 만족감을 느낀다. 분명 공간, 특히 좋은 공간은 나에게 아늑함과 편안함을 가져다준다. 공간이라는 질서 속에서 안정을 느끼고 또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 도전들을 해나갈 수 있다. 그럼에도 가끔씩은 나를 가두기 이전의 상태, 집을 짓기 이전에 아무것도 없는 흙가루를 한번 느껴보는 게 내 숨통을 틔어주기도 한다.


 리코더의 들쭉날쭉한 멜로디와 함께 웃음도 계속해서 풋 하고 나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삑사리도 바다는 파도의 팔로 그냥 다 껴안는다. 연주를 끝내고 이번엔 내가 파란 바다를 첨벙하고 껴안았다. 형태도 색도 없는 물들이 나를 아늑하게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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