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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미 May 17. 2021

평온에 대해서

108배 하기

 108배에 대한 작은 로망이 있었다. 종교는 따로 없지만 내가 생각하는 삶의 본질에 가장 가깝다고 생각 드는 종교가 불교였달까? 절에 들어가 보면 약간의 서늘함과 동시에 아늑함이 느껴진다. 웃는 것도 화난 것도 아닌  부처의 표정, 그 평온한 모습 자체가 인간으로서 돌아가야 할 본질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순간 그 자체와 같은 느낌이랄까. 그래서 불교 수행 중 하나인 108배에 괜한 환상이 있었던 것 같다. 왠지 모르게 몸과 정신이 하나가 될 방법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다 앞에서 리코더 연주를 한 다음 날, 수학여행 단골 코스인 불국사로 가기로 했다. 말로만 듣던 108배를 불국사 대웅전에서 하게 되다니. 잊고 싶은 괴로움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순전히 호기심이었다. 날씨가 더워 조금 걱정도 되었는데 막상 대웅전 안으로 들어가니 바람이 잘 통해 시원했다. 반들반들. 수많은 수행자들의 발길로 부드러워진 나무 바닥이 느껴졌다. 절을 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흘깃흘깃 살펴보고 곧장 방석 하나를 들고 와 바닥에 내려놓았다.


 나름 푹신한 방석 위에서 108배를 시작했다. 명절에 절하듯 절을 하고 두 손을 앞으로 뻗어 손바닥을 하늘로 향하게 한 후 일어섰다. 이 또한 주변에서 수행을 하는 분들의 모습을 살펴보고 따라했다. 하나, 둘, 셋... 절들이 천천히 쌓여갔다. 스물둘, 스물셋, 스물넷... '그러고 보니 내가 하고 있는 것도 절이고, 지금 이 공간도 절이네.' 잡념들이 무분별하게 흘러들었다. 엄청 힘들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 반 이상이 넘어가니 어떤 생각들도 별로 나지 않았다.


 7, 80번 정도를 하니 조금씩 조바심이 들었다. 같이 시작한 친구들이 벌써 절을 마쳤기 때문이다. 경주가 아닌데도 누군가보다 느리게 하면 본능적으로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일정이 급한 것도 아니니 하던 속도대로 천천히 108배를 마치고 부처상 앞에 반절을 했다. 몸과 정신이 하나가 되었나? 글쎄, 다른 건 몰라도 그냥 아무 생각이 안 들기는 했다. 걱정이 팍 하고 떠올랐다가 싹 풀리는 느낌일까 했는데 그런 것보다는 그냥 몸을 계속 움직여야 하니 생각이 들 틈이 없었다. 그저 배가 고팠다.


 생각지 못한 평온의 상태로 땀을 식히고 곧장 밥을 먹으러 내려갔다. 극적인 순간은 없었다. 이게 뭘까? 문득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던 때가 떠올랐다. 하루의 과제는 그저 걷는 것. 매일 몸을 쓰니 정신이 그렇게 맑아질 수밖에 없던 날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다시 돌아온 내 일상 속에서 도대체 어떤 근사한 평온을 바라는가? 페달을 구르지 않아도 나아가는 자전거 같은 평온함? 물론 때로는 세상이 내게 거저 평온함을 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내 정신이 평온하지 않을 동안 평온히 쉬고 있는 무언가를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 그중에서도 가장 확인하기 쉬운 몸, 몸부터 말이다.


 물론 확인 결과 몸의 탓이 아닐 수도 있지만, 적어도 배고픔이라는 선물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괜찮은 딜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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