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나는 여전히 호주 멜버른이야. 열심히 이민자의 삶을 살고 있어.
3년 전과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을 꼽자면 소이 라떼 모카 (개 2, 냥 1)와 가족이 되었고 SUDA와 NEMO, 나의 한국 레스토랑들은 이제 추억 속으로 사라졌어. 수다 언니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나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어.
신전 떡볶이 호주 사업부 지사장.
응, 한국 어디에나 찾아볼 수 있는 730개 매장을 보유하고 있는 그 떡볶이 브랜드 맞아.
갑자기 생뚱맞지? 멜버른 근황 이야기하다가 신떡이라니.
근데 그렇게 됐어.
잠시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볼게.
7년 차 한식 레스토랑 오너 셰프였던 나는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꼈어. 한식 타파스, 코스 음식과 와인 같은 분위기도 좋았지만 7년이나 했으니 지루해진 감도 있었고. MZ세대로 소비층이 이동하면서 좀 가볍게 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
가볍게? 어설프게 가볍게 가느니 아예 분식은 어떨까
분식? 두리뭉실할 바에는 아예 떡볶이로 집중하면 어떨까
떡볶이? 현재 메뉴에 있는 떡볶이도 충분히 맛있지만 메인으로 가는 만큼 더 강한 캐릭터를 가질 수는 없을까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기왕 할 거면 제대로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분식의 왕 떡볶이를 메인으로 내세울 거라면 센터가 될만한 최고로 하자, 한국에서 제일 사랑받는 '진짜 중의 진짜'를 직접 들고 와서 호주 사람들에게 선보이는 거야, 라는 생각에 정말 꽂혔었어.
아무 대책도 없이 그대로 비행기를 타고 무작정 한국으로 향했어.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나는 은은하게 늘 좀 미쳐있었던 거 같아.
우여곡절 끝에 나는 결국 내 소울푸드인 떡볶이, 그중에서도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브랜드이자 한국에서 가장 큰 떡볶이 브랜드 중 하나인 무려 그 '신전'을 호주에 데리고 온다는 허언 같은 꿈을 이뤘어.
우리는 2019년 12월에 멜버른 시티에 첫 매장을 오픈했지.
2년 반 후인 지금 신전 떡볶이는 호주 멜버른에서 가장 사랑받는 한식 브랜드로 성장하였어. 수백 개가 넘는 호주 전역의 한식 업체 중에서 가장 높은 2만 2천 명의 인스타그램 팔로워를 보유하고 있을 만큼 팬층도 두터워. 작년에는 연매출 25억, 객단가가 낮은 음식인 떡볶이 팔아서 나오기 힘든 어마어마한 매출을 달성했지. 신전의 호주 현지화 성공으로 힘을 얻어 다른 오래된 한국 길거리 음식 브랜드인 '석봉토스트' 도 멜버른 시티에 오픈을 했어. 내가 떡볶이 다음으로 좋아하는 분식이 길거리 토스트거든.
2022년 8월 3일 현시점, 우리는 멜버른 시티점과 노스 멜버른점을 직영으로 운영하고 있고 이번 달에 하나, 연말에 하나 추가 매장을 오픈해. 멜버른 안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호주 각 주요 도시로도 쭉쭉 뻗어나가고 있어. 그 첫걸음인 브리즈번 지점이 바로 내일모레 오픈해. 신전 호주 지사의 첫 가맹점인 만큼 한국 본사에게도 우리에게도 아주 의미가 커. 오픈을 도와주러 브리즈번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지금 이 글을 써내려 가고 있어. 내 최애 떡볶이인 신전을 내 손으로 멜버른에 오픈한 것도 신기했는데 내가 지사장이 되고 브리즈번에 신전 간판을 올린다니 사실 실감이 잘 나지 않아.
이게 나의 최신 근황을 간략하게 정리한거야.
소식 없던 3년 동안 열심히 잘 지내고 있었어.
모든 일은 다 사실이기 때문에 저렇게 이야기해도 말이 안 되는 건 하나도 없고 가끔 하는 인터뷰에도 저런 질문을 받고 저런 대답을 하지.
모두가 듣기 편안하잖아? 쭉쭉 뻗어나가는 승승장구 성공스토리.
하지만 위에 이야기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부분'들은 기름처럼 싹 빼고 살코기만 남긴 버전이야. 왜 굳이 말할 필요도 없고 괜히 말하면 분위기만 싸해지는 이야기들 있잖아 .
이를테면,
야심 찬 오픈 2달 만에 코로나가 터져버렸고 멜버른은 262일이라는 세계에서 가장 긴 락다운을 한 도시가 되었다는 이야기, 유통기한이 정해진 재료들을 한국에서 컨테이너로 받아 쌓아 두고는 전재산을 거의 탕진한 상태로 백만 원씩 깎아먹는 하루하루를 넋 놓고 보냈던 이야기,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 건지 신전은 사실 가짜다 랄지 내 개인에 대한 루머랄지, 이상한 거짓말을 계속 퍼트리는 사람들 앞에서 처음 느껴보는 무력감에 관한 이야기랄지.
잘 나가고 있던 레스토랑들을 접고 팀의 사활을 건 결정을 독단적이다시피 강하게 밀어붙였던 만큼 부담감이 나를 짓눌렀어. 내 틀린 판단으로 비자와 생계를 해결해야 하는 팀원들을 어렵게 할까 봐, 혹은 23년간 한국에서 쌓아놓은 신전 본사의 이름을 내가 여기까지 끌고 와서 망했다는 이야기나 듣게 할까 봐 불안했어. 상담을 받고 약을 먹어도 도통 나아지지 않았어. 보통은 힘들 때 나는 글을 쓰거든. 저번 우울증이 심할 때 썼던 글들은 '이민을 꿈꾸는 너에게'라는 나의 첫 책 출간이 되어 작가라는 직함도 갖게 했었는데 이번에는 그 무게가 달라서 글을 쓸 생각조차 하지 못했어. 모든 일들이 그래도 여태까지 잘 풀려왔던 것이 내가 잘하고 열심히 해서라고 생각했는데 그 모든 게 잠시 스친 행운이었나. 열심히 쌓았다 생각한 모든 것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한여름밤의 꿈처럼 느껴졌었어.
다행히, 저 모든 일은 일년이나 지난 일이야. 지금은 모든 것이 괜찮아졌어. 객관적인 지표로 봤을 때 모든 것이 괜찮음 그 이상이라고 봐도 될 거 같아. 하지만 웃기게도 장사는 아무리 바닥을 치더라도 흑자로 전환되면 바로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정상화되는데 사람은 아니더라. 바닥은 같이 쳤는데 회사는 복구가 됐지만 개인적인 복구는 아직도 한참 진행 중이야. 더디지만 그래도 다시 글을 쓰고 싶어진 것을 보니 복구가 느리지만 잘 되어가고 있다는 증거겠지? 이 글을 다 마칠 때쯤에는 원상복구를 넘어 더 밝고 더 강한 멜버른 앨리스가 되어 있을 거 같아 기대가 돼.
개인적인 멘탈 복구가 글을 다시 쓰게 된 첫 번째 이유라면 두 번째 이유는 우리의 삽질과 개고생이 우리를 살린 것을 넘어 누군가에게도 도움이 된다면 더 의미가 있어질 거 같아서, 야
12년 전 호주에 온 그날부터, 수다를 경영한 7년 간도 쉽지는 않았지만 지난 3년은 다른 차원으로 정말 미친 것만 같은 굴곡의 연속이었어. 나만 해도 20년, 우리 팀 다섯 명 요식업 경력만 합쳐도 70년이 넘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노하우와 지혜와 통찰력을 정말 마른오징어에 물 짜 듯이 쥐어짜 내도 막다른 길처럼 느낄 때가 많았어. 사실 작은 레스토랑 운영하며 우리 요리나 할 줄 알았지 무역이니 유통이니 마케팅이니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가 한국 최고의 브랜드 중 하나를 지구 반대편에 론칭하고 확장시킨다는 것 자체가 무모한 기획이었지. 그 엄청난 패기와 용감은 사실 무식에서 나왔던 거였어. 그것도 모르고 백지에서 시작해서 지금 멜버른의 푸드신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서기까지 우리는 생각지도 못한 관문을 수도 없이 통과해야 했어.
당연한 일이겠지만 정신 차려보니 그 과정에서 배운 것이 너무, 너무, 너무 많더라. 내가 아는 것과 할 수 있는 일들의 스펙트럼이 3년 전과는 비교도 안되게 넓어져있었어. 다 내려놓고 싶었던 마음을 누르고 하루하루 살아내다 보니 나, 우리 팀, 호주의 떡볶이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매일매일 조금씩 자라나고 있었던 거지.
그래서 말이야.
결론은, 그 시간을 보내며 배운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흘려버리기는 아까운 것 같아서 한번 정리를 해보고 싶어. 신전떡볶이 호주팀의 수장으로 우리의 해외 시장 공략 성공사례로 배운 많은 노하우를 공유하고 싶어.
낯선 땅에서 자리를 잡으려고 오늘도 열심히 하루를 보내고 있는 후배들과 지구별 어딘가에서 한국의 무궁구진한 콘텐츠로 취업을 하고 창업을 하고 새로운 길을 개척할 동료 한국 청년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참 좋을 것 같아.
어찌 됐든 간에 글을 쓰니까 좋다.
나는 역시 영상보다는 글, 글을 읽고 써야 나답게 살 수 사람인가 봐. 오랜만에 와서 구독자가 줄었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늘어 있어서 엄청 놀랐어!
그럼 지금부터 25편에 걸쳐 한국 청년들과 신전떡볶이의 우당탕탕 캥거루국 정복기를 천천히 풀어볼 테니 이번 연재도 재미있게 읽어주면 좋겠어.
다시 한번 3년만에 이렇게 글로 다시 만나게 되서 정말 너무너무 반가워!
PS. 원래 구독자 분들은 아시겠지만 나는 다정한 반말을 너무 애정해. 반말 사용 기분나쁘지 않기를 바래! 무례할 의도는 아니야. 그리고 불편하지 않다면 댓글도 기왕이면 반말로 남겨주면 난 더 좋을거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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