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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ent Jan 10. 2023

관광보단 여행을, 여행보단 사는 것처럼

시드니 2일 차. 로컬들의 삶 엿보기

22.12.16


오늘 어쩌다 보니 들른 동네가 한국인들이 많이 사는 동네였고, 배가 고파 구글 평점 보고 무작정 들어간 브런치 카페는 한국인들이 차린 카페였다. 분명 비행기를 10시간씩이나 타고 날아간 곳인데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안녕하세요~"하는 걸 듣는 순간 내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현지인이라기엔 너무나 서툴게 주문하는 나를 보고 혹시 여행 오신 거냐 물어봤고, 그렇다고 하니 왜 볼 것도 없는 시드니에 오셨냐고 물었다. 글쎄, 원래 내 사는 곳은 볼 거 없는 곳 아니겠어.


사람마다 여행 스타일이 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새로운 음식, 커피, 혹은 술을 즐기는 등 먹고 마시러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역사가 좋아 유적지 위주로 돌아다니는 사람도 있다. 또, 돌아다니기보단 좋은 호텔과 뷰가 있는 휴양지에서 쉬는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당연히 먹고 마시는 것도 좋아하고, 유적지를 가 보는 것도 좋아하지만,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현지 분위기를 느끼는 것을 좋아한다. 그들이 사는 동네는 어떤지, 그들이 주로 생활하는 업무지구나 상업지구는 어떠한지, 학교 주변은 또 어떠하며 공원을 걸으며 여가 시간엔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지. 그냥 끊임없이 걷고 돌아다니면서 관광보다 여행을 하고 싶어 하고, 여행보단 그들의 삶을 엿보고 싶어 한다. 어쩌면 내 여행의 목적이 '사전답사'라 그럴 수도 있다. 나를 이 도시에 대입해 보며 내가 여기에 산다면 어떨지를 계속 생각해 보는데, 아무래도 꽤나 오래전부터 해외에서의 삶을 꿈꿨기 때문인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다면, 심플하게 정말 어렸을 적 내가 주로 하던 것을 생각하면 된다. 자라며 후천적으로 변하는 경우도 많아 100%라 하긴 어렵지만, 그것이 보통 내가 타고난 기질로 좋아하는 것일 확률이 높다.  



1. 지도

보통 유치원생쯤 되는 아이들이 공룡, 탈 것 등 특정 분야에 꽂히는 경우가 있다. 나는 국기에 꽂혀 그때부터 국기와 수도에 빠삭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턴 지도 보는 것을 좋아해 맨날 지구본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20권의 백과사전 중 한국지리, 세계지리 파트만 너덜너덜 해졌었다. 나이가 먹으면서 조금 더 디테일 해 지기 시작했는데, 중학교 때는 한국지도에 관심이 많아 전국의 모든 도, 시/군/구 지명과 위치를, 고등학교 때는 서울 지도에 빠져 서울의 구, 동, 그리고 지하철 노선도를 보는 것을 좋아했다. 덕분에 서울 사람도 아닌데 어떤 노선을 가져오던 지하철 게임에서 져 본 적이 없고 서울시가 됐던, 한국이 됐던, 전 세계가 됐던 지도를 그려보라 하면 웬만큼은 그려낼 수 있다. 꽤나 상세하게.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아는 것이 즐거웠던 것 같다. 점점 내 자아가 갖추어지면서 상상 속 넓었던 세계관을 좁혀가며 조금 더 Specific 한 흥미를 만들어 갔던 게 아닌가 한다.



2. 도면

10살쯤부터인가, 어렸을 적 항상 두꺼운 신문들 사이에 껴 있던 모델하우스 광고지를 보는 것을 좋아했다. 정확히는 예쁜 외관을 가진 건물의 도면을, 그것도 평면 도면보단 입체 도면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이런 곳에서 살아보면 어떨까?'라는 상상력에서부터 비롯된 흥미인 것 같다. 어느 순간부턴 건물 조감도와 도면 부분만 오려 모으기 시작했고, 고등학교 1학년 말, 이제는 고대 유물이 된 아이팟을 갖게 된 이후로는 아날로그에서 벗어나 사진으로 모으기 시작했다.

최근에 N드라이브를 들어갔다가 이 폴더가 남아있는 것을 보고 너무 놀랐다. 클라우드에 매달 돈을 몇 만 원씩 내는 게 늘 아까웠는데, 이런 순기능이라면 그리 아깝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2012년, 17살 때부터 모았던 파일이니, '내가 여기에 진심이었구나'하며 괜히 묘한 감정이 든다. 고등학교 때 뭔들 안 재밌겠냐만은 그래도 스트레스를 푸는 나름의 취미였다. 당시에 건축학과도 가고 싶은 학과 중 하나였으나, 금방 창의력과 드로잉의 한계를 느낄 것 같아 나중에 '모델하우스 투어 다니기'를 취미로 하는 사람이 되자며 쓰지 않았던 것이 기억이 난다.

2012년 부터 시작된 도면 콜렉팅.





3. 걷기

스스로 걷는 걸 좋아한다는 것을 인지하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 즈음인 것 같다. 입시에 치이던 시절 독서실에 박혀 공부하는 것이 답답해 바람이라도 쐴 겸 동네를 걷기 시작했다. 걷다 보니 리프레쉬되는 느낌과 내가 몇 년을 살아온 동네임에도 '이런 곳이 있었어?' 싶은 곳 들이 많아 새로운 곳을 찾는 재미가 쏠쏠했다. 버스를 타고 약 20분 정도 떨어진 천변 근처에 위치한 학교를 다녔는데, 모의고사 끝나는 날이면 바로 버스를 타지 않고 노래를 들으며 천변을 따라 1시간 정도 걷다가 버스를 탔던 것 같다. 모의고사를 잘 봤으면 잘 본 대로 기뻐서 걸었고, 못 봤으면 못 본 대로 실패의 요인을 생각하고 자책하지 않으려 걸었다.


워낙에 생각하는 것을 즐기는 편이기도 하고 그에 비해 결정 내리는 것을 어려워하는 편이라, 나름의 최선의 선택을 위해 하는 많은 생각들과 고민의 고민을 거듭한 끝에 결정을 내리는 이 모든 과정은 항상 걷는 중에 이루어졌던 것 같다. 이때의 습관인지, 아니면 나름 내가 찾은 나만의 방식인진 모르겠지만 아직까지도 결정을 못 내리겠거나 무언가 생각이 많아 답답할 때면 한강변을 걷곤 한다. 주변에서 왜 회사랑 먼데 거기 살아?라고 묻지만, 사실 이것이 내가 굳이 굳이 서쪽 끝까지 오면서 한강 변에 붙어있으려고 하는 이유이다. 걸으려고. (사실 횟수로 치면 그리 많진 않지만, 많지 않은 그 횟수가 내 삶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더라)



이 모든 것을 모아놓은 하나의 집결체가 지금의 내 여행 스타일이다. 그래서 에펠탑처럼 꼭 가야 하는 관광지나 유적지 외에는 크게 주거지역과 업무지역, 대학교 근처나 강가나 큰 공원 같은 도심 속 자연환경을 즐길 수 있는 곳들을 간다. 그냥 노래 들으면서 괜찮은 건축물들이 가득해 보이는 동네나 대학교 근방을 정처 없이 거닐고, 그러다 다리 아프면 평점 좋은 근처 카페나 펍을 찾아 글을 쓰거나 책을 읽으며 쉬고, 맛있는 거 먹고, 야경 보고. 이게 한량 같은 내 여행의 전부다. 심플하다. 그래서 혼자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누가 이런 내 여행에 동참해 주겠어.


어쩌면 비교적 어린 나이에 호주까지 더해 34개국을 돌아다닐 수 있었던 이유도 내 본연의 성향에서 우러나온 것이기에 가능했던 걸지도 모른다. 보여주기 위해서도 아니고, 남들이 가니까 가는 것도 아닌 그냥 내 타고난 성향에서 우러나온 것, 그냥 좋아하는 걸 하는 것이기 때문인 것 같다. 남들이 뭐 하고 싶냐고 물으면 항상 떠돌고 싶다고 대답하니까. 전생에 집시었냐는 소리를 한 두 번 들은 게 아니다.

                                                                                                                     

                




분명 페리 타고 내린 곳이 예뻤다는 이야기를 하려 했는데, 배경 설명이 이리도 길어졌다.


오늘은 정말 아무 목적 없이 페리를 탔다. 물을 좋아하다 보니 물을 실컷 볼 수 있는 배를 타는 것도 좋아한다. 다만 멀미를 좀 하는 편이라 잔잔한 곳을 누비는 큰 배에 한해서만. 그래서 보통 페리를 교통수단으로 가지고 있는 도시에선 신나서 페리를 탄다. 남들이 재미없다던 코펜하겐과 스톡홀름이 나에겐 너무 좋은 기억으로 남았던 이유에도 페리가 큰 역할을 했다.


시드니에는 총 8개의 페리 노선이 있다. 이 중 가장 긴 노선이 F3, 파라마타 강을 쭉 타고 들어가는 노선인데, 종점까지 거의 1시간 가까이 걸린다. 한 시간이 걸리는 페리라니, 그것도 대중교통으로. 안 탈 수가 없다. 목적지는 없었다. 그냥 이뻐 보이는 곳에 내리는 거다. 그렇게 오늘의 여행이 시작됐다.


Meadowbank, Sydney

그리고 나는 여기에 홀려 어딘지도 확인하지 않은 채 무작정 내렸다.

모르겠다. 우리나라의 획일화된 닭장 같은 아파트만을 보고 자라서 그런지 이런 개성이 한껏 묻어나는 아파트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헉 한다. 사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직장과 주거환경이 삶에 미치는 영향이 굉장히 큰데, '다양성'이라는 것을 굳이 내가 배우려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환경임이 부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다양성'이라는 가치를 추구하며 살고 싶나 보다.


유독 저 건물에 눈이 갔던 이유는 내가 고등학교 시절 좋아하던 건물 중에 하나인 서초동에 위치한 방배금호리첸시아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인 것 같다. (지금 보니 꽤 다른 것 같기도 하고..ㅎ)

방배 금호 리첸시아, 서울

당시에 이 건물을 보고 상당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오피스텔스러우면서도 아파트 같고, 그 속에서 서로 다름을 표현하려는 듯 알록달록함이 조금씩 묻어있는 것이 나름 서울에 비하면 시골인 광역시에서 자란 고등학생이 보기엔 꽤나 신기한 건물이었다. 건축가의 후일담을 찾아보니, 최초엔 아파트 내부 평면도까지 남향, 동향 등 방향에 따라 다르게 구성하려 하였으나 이러면 분양이 안될 거라는 시공사의 반대로 결국 내부 구조는 획일화했고, 약간의 다름을 드러내고자 외관만 변화를 준 아파트라고 한다. 이 마저도 당시에는 시선이 그리 좋지 못했다고 하니 우리나라가 얼마나 '다름'이라는 가치에 대한 존중이 부족했는지 알 수 있다. 항상 가성비를, 다름보단 비슷함을 추구하기 때문에 이렇게 소규모의 개성 있는 아파트를 짓기가 어려운 데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비용을 아낄 수 있다는 이유로, 편리하다는 이유로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선호하니 어쩔 수 없는 수순이다.



유현준 교수님께서 우리나라 아파트의 가장 큰 문제로 '획일화'를 꼽았다. 획일화가 되면 집은 '주거'의 기능보다 '화폐'의 기능을 갖게 되고, 다 비슷한 곳에 살다 보니 집에 대한 가치판단의 기준이 집값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산업화를 거치면서 분야를 불문하고 가장 효율적인 '표준화'와 '대량생산'을 통해 지금의 대한민국이 될 수 있었지만, 그로 인해 가치관이 정량화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집값도 하나의 예시로 우리는 집을 판단할 때 우리 집만의 특색보단 집값을 우선으로 한다. 물론 영상에서 말하진 않았지만 우리나라 국토 특성상 인구밀도 대비 사람이 살 수 있는 국토의 비율이 극도로 적은 것도 한 영향이 있었을 거다. 대부분의 땅 덩어리가 넓은 나라들은 다양한 주거 형태를 가지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외국의 경우 아파트 내에서도, 주택 내에서도 굉장히 다양한 형태를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내가 페리에서 본 뷰처럼.


이 영상이 나에겐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특히 잠실처럼 똑같은 아파트들이 다닥다닥 있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가면 왠지 모를 숨 막힘이 있는데, 그 원인을 설명해 주는 영상이었달까.


연장선으로 우리나라 중산층의 기준과 다른 나라의 중산층의 기준을 돌아보면 확연한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정량적 가치의 문제점은, 정량화할 수 없는 정성적인 개인의 가치를 인정받기 힘들다는 것에 있다. 우리 모두는 남들과 비교할 수 없는 본연의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정량적 가치만을 인정하는 사회에선 이러한 모습들이 무시되기 마련인데, 이것이 나는 요즘의 세대갈등의 원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정량적 가치만이 전부였던 기성세대들과, 정량적 비교가 판치는 사회에 지쳐 그 속에서 우리가 놓치고 산 가치의 중요성에 눈을 뜬 젊은 세대들.




다시 여행기로 돌아와서,

이곳은 meadowbank라는 곳으로 나름 시드니 내에서 개발된 지 그리 오래 안된, 깔끔하고 아파트화 되어있는 동네라 아시아인들이 많이 산다고 한다. 아무리 다른 도시에, 다른 나라에 살더라도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은 무시하지 못하나 보다. 트레인 타면 20분 정도면 센트럴로 갈 수 있고 페리도 있으니 이 정도면 내가 서울에서 사는 데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서울로 치면 글쎄, 마곡 쪽에 있는 엠벨리 단지 느낌이랄까. 물론 분위기는 많이 다르긴 하다..ㅎ



meadowbank, Sydney

이렇게 단지 내에 한국 치킨집과 마트도 있고, 자세히 보면 치과까지 한국어로 적혀있다.



Rhodes, Sydney

다리를 건너면 있는 맞은편 동네도 이렇다. 웬만한 한국의 슈퍼마켓보다 더 큰 소주 칸을 가지고 있는 아시안 마트와 음식점, 심지어 스킨케어까지.


유년시절을 현지에서 보내면서 문화적 배경에 스며들었다거나 모국어 수준으로 언어를 편하게 구사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아무리 내가 영어를 열심히 공부하고 로컬들과 섞이려고 노력해도 결국 한국인이기에 필연적으로 한국인스러움이 필요하다. 한국인 커뮤니티가 아니더라도 내 식량을 조달할 수 있는 한식당이나 한인 마트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으면 좋다. 내가 프라하 생활이 행복했던 이유도 내가 살던 기숙사에서 트램으로 2 정거장만 가면 한인마트가 있었고, 거기서 오징어 젓갈, 비비고 만두, 불닭볶음면과 같은 나의 식량을 조달할 수 있었던 것도 컸다. 외국인들 틈에서 매일매일 빵, 감자, 풀떼기만 먹었다면 훨씬 빨리 지쳤을 거다. 타지에 있어도 내 뿌리는 한국인이기에 대상이 무엇이던, 방식이 어떻던 한국스러운 무언가를 붙잡고 있어야 타지 생활도 성공적으로 잘할 수 있는 것 같다. 유학을 가더라도 무조건 한국인을 배척하기보다는 두루두루 어울리는 게 좋다고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시드니까지 여행 가서 저런 곳을 가?라고 할만한, 남들이 잘 가지 않는 교외 지역을 돌아다녀보며 이런 동네라면 너무나도 즐겁게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행복감에 빠질 수 있었던 동네 투어였다. 이틀 차, 어디를 가든 뭘 보든 좋을 때지만 2주가 흐른 후까지 이 감정이 유지가 된다면 그렇게 행복할 수 없을 것 같다.


여행기를 써보고자 했는데, 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삼천포로 빠져나가는 지라 점심에 가게 알바생의 질문에서 뻗어나간 이야기가 중산층 이야기까지 이어지는, N의 정석과 같은 글을 남기고 가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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