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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클베리 Jul 20. 2022

오버클래스 ID

#오버클래스 ID #냄새이야기 #쉐이브젤 #추억 #개발자


오늘 아침 며칠 전 새로 산 쉐이브 젤 (shave gel)을 처음 써봤다. 


남자라면, 더욱이 쉐이브 젤을 새로 산 남자라면 누구나 얼른 써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을 거다. 하지만 욕실 선반엔 기존에 쓰던 제품이 아직 남아있었다. 


조금 남아있는 걸 그냥 버릴 정도로 플렉스 가능한 수준은 못되다 보니 2주가 넘도록 그걸 다 쓰고는 드디어 새 걸 개봉하는 내 마음이 어땠겠나. 




사흘 전 아침이 떠오른다. 

통 안에 남아있던 젤이 가스와 함께 '푸드드득푸드드득' 소릴 내며 저항하던 그날.


'우리에겐 아직 12 덩이의 거품을 만들 만큼의 젤이 남아 있사옵니다!' 

'조금만 아끼시면 한 번 더 면도하실 수 있사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하지만, 그 거센 저항도 다음번엔 기어코 새로 산 쉐이브 젤을 쓰고야 말겠다는 내 의지를 꺾을 순 없었다. 

오히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 양손 가득 과하게 많은 양의 거품을 낸 나는 사치 찬란한 면도를 했더랬다. 




지난 면도가 잠깐 떠올랐지만 욕실 선반 위 화려한 통을 집어 든 순간 이내 사라졌다. 


'오.. 손흥민도 쓴다는!' 


분사구 쪽 비닐 포장을 뜯고는 버튼을 눌렀다. 

손바닥에 젤이 짜이는 그 짧은 찰나에도 분명 내 머릿속은 호들갑이었다. 


'이번 쉐이브 젤은 어떤 느낌일까? 비싼 건 데~~ 아니지 2개 묶음 행사 가격으로 샀으니 한 통에 이 가격이면 싸게 산 건 가? 어쨌든 지금까지 써본 것들 중 가격으로 치면 제일 비싼 제품인데 분명 부드럽고 좋은 느낌이겠지? 상처 잘 나는 내 피부에도 딱 맞는 제품이면 좋겠는데~!'




매일 샤워를 하고 몸에 오일인지 크림인지 로션인지를 바르는 아내에게선 좋은 냄새가 난다. 나도 물론 향이 짙은 스킨과 로션을 쓰긴 하지만 그 제품들을 쓰는 이유는 향이 좋아서 라기 보단 가성비가 훌륭해서다. 

스킨, 로션 각각 3병을 주문해 쟁여 두고는 2년 내 매일 쓰고 있다 보니 익숙해서 인지 냄새도 딱히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달까. 


두 아이의 아빠가 된 후로는 향수도 거의 안 쓰게 되었다. 그렇다 보니 일상에서 잘 조향 된 냄새를 맡을 때가 별로 없다. 


이번에 산 쉐이브 젤은 차범근 선수와 함께 역대 우리나라 최고의 축구 선수라 평가받는 박지성, 손흥민 선수가 광고 모델이었던 브랜드에서 비교적 최근 출시된 제품이었다. 




그래서 이 냄새가 날 거라고는 미처 생각도 못했다. 


'오버클래스 ID'


이젠 전설이 되어가는 배우, 윤여정 씨가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며 농담을 던졌던 그 배우 '브래드 피트'가 광고 모델로 나와 인기를 끌었던 스킨, 로션 제품이다. 


25년도 지났는데.. 그때 그 냄새가 떠올랐다. 

내 인생 통틀어 가장 자유로운 시절이었던 그때 난 맘에 드는 브랜드 청바지를 한 벌 사 입겠다고 석 달 내 용돈을 모으던 철없는 대학생이었다.


X세대라던. 우스갯소리로 안 되는 세대라던.


하지만 캠퍼스에 그 흔한 공대 하나 없어 리눅스 초기 배포판 CD를 무료로 나눠주던 그때에도 그게 뭔지 어따가 쓰는 건지도 모른 채 볼펜으로 리포트를 써내던 경영학도 대학생 시절은 나에게 유일한 자유의 시절이었다. 


그리고 대학시절 내내 내 책상 위에 있던 오버클래스 ID의 냄새는 바로 그 시절을 떠올려주는 유일한 스킨 냄새다.




어느덧 개발자가 되고.. 


그것도 리눅스 개발환경에 가장 익숙한 18년 차 개발자가 되어 '오버클래스 ID'란 이름조차 너무나 코딩스럽다 느끼는 오류 가득한 사고체계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때때로, 아니 우연히 멍 때리는 순간이라도 오면 난 타임머신을 타고 지난시절을 찾아 헤맨다.


타임머신속에서 찾아낸 순수한 시절은 과거가 되어가는 현재보다 천배나 긴 시간을 여행하는 것이기에 그런 우연이라도 맞는 날은 완전 수지맞은 날이다. 


일상의 대부분을 용도에 맞는 자유와 감성을 부려야 얻어맞지 않는 나이가 되었기에 오늘 아침의 환각은 잠깐이나마 순수했다. 


그리고 자유로웠다. 



길들여진다는 것은 다 똑같아지는 것. 난 나일 뿐이라고.. 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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