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포레스트 제이 Oct 29. 2023

유네스코 루트 - 중국 3편

명과 청 시대의 황릉

Imperial Tombs of the Ming and Qing Dynasties  (유네스코 문화유산 #1004)


명과 청 시대의 황릉들은 500년 이상 중국 대륙 북부지방을 지배했던 세력의 문화, 건축적 전통을 보여 주는 훌륭한 유산이다. 이 유적은 주변 자연 조화를 이루며 자연경관과 문화경관의 독특한 앙상블을 이루어 내고 있다. 옛날부터 중국의 통치자들은 능묘 건설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는데, 이는 죽은 후에도 내세가 있다고 믿었을 뿐 아니라 황실의 권위를 확인하려는 이유에서였다.


1368년 명 황조가 시작하면서 황릉의 전반적인 설계 원칙이 정해졌다. 이 원칙은 황제가 사후에도 거닐기에도 알맞은 자연환경, 그리고 무덤을 중심으로 하는 일련의 건축물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황묘의 자연환경은 평원이거나 널찍한 골짜기로, 북쪽으로는 산을 면해 있고 남쪽으로는 낮게 경사진 곳에 무덤이 자리해야 했다. 그리고 동서로는 언덕들과 적어도 한 개의 물길이 있어야 했다. 자연환경과 잘 어우러지도록 ‘신도(神道)’라 불리는 길이가 수 ㎞에 이르는 주된 길을 따라 여러 건축물들이 세워졌다.

(왼쪽 : 명십삼릉의 대홍문 / 오른쪽 : 명십삼릉 안내도)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중국 명과 청 시대의 황릉들은 명나라의 명십삼릉, 명현릉,  명효릉과 청나라 황릉인 청동릉, 청서릉, 그리고  2003년 추가된 요녕성(遼寧省)에 있는 영릉, 복릉, 소릉 등이 있으나, 오늘은 직접 방문한 명십삼릉 위주로 대해서 소개하고자 한다.


[명십삼릉(明十三陵)]

베이징에서 북서쪽으로 약 45 km 떨어진 창핑구 스산링진 천수산 기슭 40 km² 분지에 위치한 무덤군을 말한다. 역대 명나라 황제 16명 중 13명이 여기에 묻혔는데, 중국에서 가장 많은 황릉이 모여있고, 규모도 제일 크다. 명나라가 멸망하기 전까지 약 220년간에 걸쳐 만들어졌다.

일반에게 공개되는 릉은 장릉(영락제), 소릉(융경제), 정릉(만력제) 3곳이며, 이중에서 정릉은 제13대 황제 만력제의 능으로 유일하게 지하궁전까지 발굴되어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1) 신도(神道)

현재는 명십삼릉 티켓 판매소 겸 정문 역할을 하며 규모가 크기 때문에 별도의 공원으로 되어 있다. 황묘로 안내하는 ‘신도’는 신성한 지위를 부여하는 우주생성론의 형태로 만들어졌다.

신도를 여는 입구는 석패루(石牌樓)로 시작된다. 이 문을 들어서면, 신공성덕비(神功聖德碑)가 있는데 황제의 치적을 기리는 묘비이다.

(왼쪽  : 석패루 / 오른쪽 : 신공성덕비)

이후, 길게 뻗은 길은 쌍을 이룬 동물들과 문무 관료들을 새긴 돌기둥과 석상들 거친다. 신도가 끝나면, 돌다리와 용봉문(龍鳳門)을 지나면 나뭇가지처럼 뻗은 길들이 13개의 황릉으로 안내한다.

(윗줄  왼쪽: 쌍을 이룬 동물상들 / 오른쪽: 문무상 석상들,    아래줄 : 용봉문)

2) 정릉(定陵)

만력제는 10살의 나이로 황제에 올라 무려 47년간 재위한 명나라 13대 황제이다. 중국에서는 국세낭비 등 무능한 황제로 알려져 있는 만력제는 우리나라에는 은인 같은 존재이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사를 파병하여 왜구들을 퇴치하는데 공헌한 인물이다 보니, 정릉에는 한국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미움을 받어 정릉 발굴시 만력제의 유골이 발견되었으나   홍위병들이 완전히 파괴해 버렸다고 한다.

"조선은 대대로 공순하다고 일컬어졌는데 마침 곤란을 당했으니 어찌 좌시만 할 것인가. 만약 약자를 부축하지 않으면 누가 은덕을 품을 것이며, 강자를 벌주지 않으면 누가 위엄을 두려워하겠는가. 더구나 동방은 바로 팔다리와 같은 번방(藩邦)이다. 그렇다면 이 적은 바로 집뜰에 들어온 도적인 것이니, 그를 저지하고 죄를 주는 것은 나 한 사람에게 달려 있다. (만력제의 조서, 선조실록 선조 32년(1599) 5월 20일 )"


(정릉의 대홍문 / 정릉 안내도)
(제를 지내는 사당 / 명루 / 위령탑)

정릉의 정문인 대홍문을 지나고, 제를 지내는 사당 옆으로 여러 건축물과 위령탑이 있다.


위령탑 아래쪽은 벽으로 둘러싸인 지하 묘실로 이어진다. 관이 안치된 방까지 천장이 둥근 석실들로 이어졌는데 문과 벽은 흰 대리석이다. 석판들이 단단히 맞춰져 실내는 250년이 지난 지금도 완전히 건조된 상태이다. 무덤의 내용물은 대부분 현재 고궁박물원에 소장되었다.

(지하 묘실의 지상 입구 / 지하 입구)
(지하 묘실 안내도 / 석관 / 유물들)

----------------------------------

명나라의 조선 출병은 명나라의 멸망 원인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이후로도 명나라가 50여 년간 계속된 것을 보면 예방전쟁의 꽤 성공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서는 숭명 사상을 바탕으로 만력제의 공덕을 기리는 만동묘와 대보단을 숙종 대에 세우게 되었다. 만동묘는 송시열의 제자들이, 대보단은 국가에서 세운 것이다. 충북 괴산군에 아직도 존재하는 만동묘는 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 폐지되었다가 대원군 실각 후인 1874년에 복구되었다.

(만동묘 : 이미지 출처 - 나무위키)
작가의 이전글 유네스코 루트 - 중국 2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