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mmer Palace, an Imperial Garden in Beijing (유네스코 문화유산 #880)
이화원 (頤和園)은 베이징 북서쪽 교외에 자리한 황실 정원으로, 중국 정원 조경의 최고 걸작이다. 1750년에 처음 만들어졌다가 1860년 제2차 아편전쟁 때 심하게 파손되었고, 1886년에 원래의 기초 위에 다시 복원되었다. 인공호수 주변으로 정원과 여러 건물들이 조화를 이루어 훌륭한 미적 가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화원은 최후의 황실 정원이다.
청나라 6대 황제인 건륭제 때인 1750년, 원나라때 저수지로 개발된 베이징 북서쪽만수산 지역에 자신의 어머니인 효성헌황후의 환갑을 맞이하여 이화원의 전신인 '청의원(淸漪園)'을 만들고, 항저우의 서호를 모방해 이곳에 재현했다. 이후 1860년 제2차 아편전쟁 때 영불 연합군이 청의원을 불태우고 목조 건축은 전소되었다.
서태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피서지로 삼고자, 광서제 시절(1884~1895)'이화원'이라 개칭하며 재건하면서 규모가 커졌다. 하지만 1900년 8개국 연합군의 침입으로 또 훼손되었고, 1902년 베이징에 돌아온 서태후는 원내의 동쪽 부분만 보수하였다. 중화민국 수립 후, 청실의 사유 재산이 되었고, 1914년에 일반인에게 개방, 1924년에는 일반 공원이 되었다.
약 4㎢의 규모로 설계된 이화원은 서태후가 정사를 돌보던 정치활동 구역, 생활거주 구역, 휴식 및 유람 구역 등 3개 지역으로 나뉘어 있다.
1) 정치활동 구역
[동궁문(東宮門)]
이화원의 정문인 동궁문으로 들어가면, 먼저 정치활동 구역이 나온다. 현판에 적힌 ‘이화원’ 편액은 서태후의 조카 광서제가 쓴 것이다.
이화원의 정문으로 앞에는 1쌍의 청동사자가 놓여 있고 문에는 3개의 통행용 출입구가 있는데, 황제나 황후가 출입하던 가운데 문은 어로문(御路門)이라고 불렸다.
[인수문(仁壽門)]
이화원의 이중 궁문으로 편액은 한자와 만주어로 적혀 있다.인수문 뒤편에쑤저우성 태호 지방에서 옮겨놓은 태호석이 있는데 생김새가 하얀 수염을 갖춘 세속신인 노수성을 닮았다 해서 '수성석(壽星石)'이라 부른다.
[인수전(仁壽殿)]
인수문 뒤쪽에는 정치활동구의 중심인 인수전이 있다.서태후와 광서제는 이곳에서 정무를 보며 외국 사절들을 접견했다. 인수전 앞에는 청동으로 주조한 봉황, 용, 항아리, 향로가 놓여 있는데, 중국 예법에는 황제를상징하는 용이 가운데에 놓여야 하지만, 서태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는용 대신 봉황을 가운데에 놓아 황제보다 높은 서태후의 권력을 과시했다.
[지춘정(知春亭)]
이화원 곤명호수 동쪽 편에 자리 잡고 있는 지춘정은 인수전 옆 호숫가에 위치한 작은 두 개의 섬에 위치하고 있다. 인수전 다보탑에서 다리를 건너면 지춘정이 있고, 다시 한번 다리를 건너면 호숫가로 연결된다. 지춘정이 있는 작은 섬에는 수양버들이 많이 있고, 지춘정은 지붕이 이층으로 되어 있다. 지춘정 앞쪽으로는 연꽃이 넓게 펼쳐져 있다.
2) 생활거주 구역
생활거주 구역은 서태후가 생활한 낙수당, 광서제와 그의 황후가 생활한 옥란당, 그리고 황제의 첩들이 생활한 의운관 3개의 건물군으로 이루어져 있다. 3개의 건물은 지붕이 있는 복도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낙수당(樂壽堂)]
'지혜로운 자는 즐겁고 어진 자는 장수한다(知者樂 仁者壽)'는 논어 구절에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광서제 때 서태후는 이곳을 침궁으로 사용했다. 좌우에 각각 서난각, 동난각 곁채가 하나씩 있고, 내부에는 독일에서 수입한 샹들리에가 걸려 있다. 낙수당 앞에 놓인 청동 사슴, 학, 항아리는 한자음을 빌어 '육합태평(六合太平)'을 상징한다. 낙수당 본채는 서태후의일상생활공간이고 서난각은 침실, 동난각은 탈의실이다.
[장랑(長廊)]
생활거주 구역의 건물에서서쪽으로 가는 728m의 긴 복도인 '장랑'은 벽과 천장에 만여 점의 그림이 그려져 있어이화원의 명물이다.서태후가 산보할 때 애용했다고 한다.
복도 중간중간에 ‘춘하추동’을 본뜬 유가(留佳), 기란(寄瀾), 추수(秋水), 청요(淸遙)라는 4개의 정자가 있다.
3) 휴식 및 유람 구역
이화원의 대부분 지역은 곤명호를 중심으로 하는 유람 구역으로 전체 면적의 75%를 차지한다. 만수산의 북쪽은 가파른 비탈에 물줄기가 굽이 흐르는 깨끗하고 조용한 지역이다. 호수와 호수 주위의 낮은 언덕으로 이루어진 정원의 전체 틀 안에 여러 전각과 누각들이 잘 배치되어 있다.
[곤명호(昆明湖)]
곤명호는 양자강(揚子江) 남부 지역의 여러 형태의 자연경관을 보여준다. 곤명호의 동쪽에 있는 웅장한 십칠공교(十七孔橋)는 동쪽 기슭과 동궁문 풍치 지구를 연결하고 있는데, 다리 난간에는 모양이 각각 다른 544마리의 돌사자가 새겨져 있다.
[배운전(排雲殿)]
서태후의 생일 축하연을 열었던 건물로, 이 주변에 다른 누각과 전각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만수산 남쪽 중턱에 위치한 정면 7칸, 측면 5칸의 전각이다. '신선이 구름을 헤치고 나오니(神仙排雲出)'는 시구에서 비롯되었다. 자소전, 옥화전, 방휘전, 운금전의 4개 배전이 딸려 있다.
[덕휘전(德輝殿)]
배운전에서 좀 더 올라가면, 덕휘전(德輝殿)이 있다. 불향각으로 향하는 중간 위치에 존재한다.
[불향각(佛香閣)]
불향각(佛香閣)은 만수산 언덕 남쪽에서 보면 전체 구조물들의 정중앙이 되며, 산과 호수와 어우러져 건축 예술의 걸작으로 평가된다. 높이 41m, 3층 팔각 건물로 8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으며, 유리 타일로 된 지붕으로 덮여 있다. 원래, 1750년 건륭제는 9층탑을 지으려 했다가 원안을 수정, 8층탑으로 지었다.
1860년 제2차 아편전쟁 때 영불 연합군의 방화로 소실되었다가 1891년 서태후가 3층으로 중건하였다. 불향각 1층에는 1574년에 제작한 '나무대비관세음보살'을 모셨는데, 높이 5 m, 얼굴 12개, 눈 36개, 팔 24개가 달린 보살상으로 꽃잎 999장이 조각된 연화보좌 위에 서 있다.
[석방(石舫)]
곤명호 북단의 서쪽 호숫가에 자리한 배 모양의 건물이다. 길이 36m이고 선체는 거석을 다듬어 만들었는데 2층으로 되어 있다. 배의 내부는 꽃무늬 벽돌로 바닥을 깔았고 창문에는 채색유리를 상감했으며 천장은 벽돌 조각으로 장식했다.
원래 1755년에 건륭제가 만들었으나, 현존하는 석방은 1894년 서태후가 이화원을 재건할 때 선체를 서양식으로 바꾸었다.
[소주가(蘇州街)]
후호(後湖)의 중심에 있는 소주가는 건륭제 때 건설되었다. 양쯔강 이남의수상도시 시장을 모방하면서도 베이징 시장의 특색을 겸비했으며, 한 줄기 물길을 따라 양안에 2갈래 거리가 형성되어 있다. 총길이 약 300 m, 각종 점포 60여 곳이 줄지어 있고, 상점가에는 관광객을 위한 점포가 들어서서 청나라 때 동전으로 물건을 구매하는 체험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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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후는 청나라 9대 황제 함풍제의평민 출신 후궁이었으나, 함풍제의 장남인 10대 황제 동치제를 낳으면서 의빈, 의비를 거쳐 의귀비의 자리에 오른다. 자신의 아들인 동치제가 6세의 나이로 즉위하면서, 함풍제의 정실 황후인 동태후와 더불어 황태후 자리에 올라 서태후가 되어 수렴청정을 시작하였다. 이후, 11대 황제인 조카 광서제 시기까지 청나라 제일의 권력이 되었다. 오늘날의 '비선실세'인 셈인데, 중국 역사상 여성 지도자가 별로 없었기에 많은 탐욕과 국세 낭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인기 있는 인물로 남아있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