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이 길이 되려면>을 읽고, 김승섭 교수님께
우리 몸은 정직하지만, 현실 사회는 정직하지 않습니다. 현실 사회의 부정(不正)을 정(正)으로 바꾸려면, 사회적 부검이 필요합니다. 진단하지 않으면 해결책도 없기 때문입니다.
헬조선이란 단어는 보통 명사로 자리잡았습니다. 지천엔 비정규직이 깔려 있고, 주 52시간이니 뭐니 하지만 노동 효율성은 멀기만 합니다. 애초에 그게 지켜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휴가를 내려면 마치 죄라도 짓는 듯, 주인님께 허리를 굽혀야 합니다. 양극화는 점점 심해집니다. 아직 한국은 IMF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 한 것 같습니다. 한국 사회가 이해의 폭이 좁고, 의미 없는 소통이 가득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의 책임은 유한하지만, 사회의 책임은 무한합니다. 지리멸렬한 경쟁 구조에서 개인이 극복할 수 있는 한계는 분명합니다. 우리는 ‘망실된’ 사람들에게만 진단을 내립니다. 한계를 극복하지 못 하고, 절망을 맛보는 사람에게만 진단의 자격이 주어지는 겁니다. 세상이 이렇게 모욕적일 수 있습니까. 도움이 필요하면 진단이 시급한데, 이 땅에서 진단은 후속조치에 불과합니다. 그렇지만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 진단조차 내리지 않는 사회는 종말입니다.
“희망은 항상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있어요. 진짜예요”라는 교수님의 말씀이 뇌리에 선명합니다. 저는 교수님이,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투명한 사람들을, 선명하게 드러내 보이는 역할을 하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들이 짙게 드리운 그림자로 비칠지라도 그건 그런대로 의미가 있습니다. 그걸 보고 누군가는 불만을 가질 겁니다. 그 불만은 제각기 형태로 사람들에게 자리잡을 테죠. 불만은 영혼을 일깨웁니다.
아직은 이 땅에 손 쓸 시간이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변화가 일어나기 전까진 통증을 쏟아낼 수 없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영혼을 일깨울 불만 거리를 던져 주십시오. 원래 희망은 어둠에서 싹트는 법입니다. 사회역학이 국내에서 더 활발해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