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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머 Nov 05. 2020

거품 인간

오늘날 추앙과 추락은 동의어가 아닌가 생각한다. 추앙받는 사람은 반드시 추락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누군가 기대에 못 미치는 모습을 보인다 싶으면 사람들은 득달같이 달려들어 대상의 무릎을 꿇리고야 만다. 그때 그들은 참수를 집행하는 광인의 형상이다. 죄인이 가진 전부를 베어버릴 심산으로 심판대에 오른다. 이날은 표정이 이랬고 저 날은 행동이 어땠네 하며 죄인이 살아온 시간대 전체를 샅샅이 수색한다. 관상을 운운하며 사람의 얼굴을 객관적인 증거라도 되는 양 비평하는 건 기본이다. 그들이 목표하는 바는 단순히 지위와 물질을 박탈하는 데 있지 않다. 인간 본성을 조각난 단면으로 판단하려는 사실에 미루어 짐작해 볼 때 그들의 목적은 한 인간의 절망에 있다고 확신한다. 

  

기필코 끌어내리고야 말겠다는 의지는 너무나 숭고해서 제동을 걸 수조차 없다. 누가 감히 어떤 용기로 정의의 휘장을 걷어내려 하겠는가. 나락에 빠져든 사람이 좀처럼 원래의 위치로 되돌아오기 힘든 이유다. 문제는 그들이 사람이라면 으레 둘러야 할 최소한의 보호막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들은 보호막을 깨뜨리는 일을 정의가 수반하는 의무이자 권리라 착각한다. “얘 완전 거품 아니야?”라는 말은 활시위에 화살을 걸어놓는 행위와 다름없다. 대상이 분수에 맞지 않은 위치에 있다는 의문이다. 일종의 예고이기도 하다. 거품을 터트리려는 정교하고도 숨 막히는 예고. 그렇게 정의의 손가락은 화살이 되어 과녁으로 향한다. 


생각해보면 추앙과 추락이 주는 파급력은 예전만 못하다. 힘을 잃었다. 이것들이 더는 엄숙한 단어가 아님에 나는 겁을 먹는다.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이 별이 되지만 어느샌가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언젠가부터 인간의 결말은 항상 초신성이다. 펑 하고 둔탁한 소리를 내며 터진다. 방대한 미디어의 파고 아래 한 사람이 다수의 공격으로 결딴나는 현상은 이제 해가 뜨고 달이 차오르는 하루의 변화처럼 당연한 일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초상을 악플이라는 단어 하나에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선악을 잣대로 현상을 파악하는 것 자체가 속 편한 생각이 아닌가.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말이다. 대체 왜 그들이 그렇게까지 사람을 한계까지 몰아붙이는지 나로선 알 턱이 없다. 그들의 정열을 깨뜨릴 논리도 없다. 그저 인간을 납작하게 만들려는 모든 시도에 반대할 뿐이다.      


인간이 상품인 시대다. 맘에 안 들면 자본주의에 맞는 합당한 응징을 하면 그만이다. 간단하다. 아이돌이라면 앨범과 음원을 사지 않으면 된다. 유튜버라면 구독을 끊고 지나치면 된다. 섬네일마저 보기 싫으면 ‘채널 추천 안 함’, ‘관심 없음’이라는 항목도 있다. 구태여 죽일 듯 갈기갈기 찢어발기지 않아도 상품의 가치는 내려간다는 이야기다. 헐거운 윤리 따위는 벗 삼을 필요가 없다. ‘정의구현’이라니. 정의라는 단어는 그렇게 쓰는 게 아니다. 건방지게도 본래의 말뜻을 오염시키는 그들 때문에 나는 이제 정의를 운운하는 자들을 믿지 않기로 했다.

    

조그만 거품도 용납하지 않는 사회다. 치부를 찾으려 새빨간 눈으로 온갖 곳을 휘젓는 이들이 도처에 깔렸다. 그들은 잠들지 않는다. 24시간 쉬는 법이 없다. 건수가 잡힌다 싶으면 앞뒤 재지 않고 물어뜯는다. 그러므로 피해는 당사자에게 국한되지 않는다. 상처는 전염과도 같아서 대상의 주변인까지 파국으로 몰고 간다. 거품 하나가 터지면 인접한 다른 거품도 터지는 법이다. 아들딸이 다치는데 부모라고 멀쩡할까.      


얼마 전 한 사람의 아이가 유산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이의 아버지는 최근 떠들썩했던 유튜브 콘텐츠의 수혜자라고 했다. 몇 번 그의 얼굴을 영상으로 본 적이 있으나 별다른 친밀감은 없었다. 당연히 그에게 해줄 말도 없었다. 하지만 생각은 했다. 어떤 말도 그와 그의 아내를 위무하지 못할 거라는 한가로운 생각을 했다. 고통에는 기한이 없고 어둠은 언제 소멸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당사자가 아니라면 그 심정을 알 방법은 없다. 구원은 결국 스스로 찾아야 한다. 인간을 외롭게 만드는 것. 그게 고통이 주는 비극이다.     


관계망 속에서 거품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거품이 걷히면 사람은 오롯이 혼자로 남는다. 바라건대, 우리는 한 사람이 기댈 수 있는 최소한의 장막을 용인해주어야 한다. 오염된 말들이 침범하지 못 하도록 말이다. 흠결이 놀잇거리가 되어선 안 된다.     


게다가 사람이 죽는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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