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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김 Jan 30. 2023

소설 습작

습작을 하며 배운 것들

A4 뭉치가 책 한 권만큼 쌓였다.

3만 자 정도밖에 되지 않는 단편 소설이었으나 퇴고하고 또 퇴고하다 보니 어느새 원고 뭉치가 잔뜩 쌓였다. 그래도 더 퇴고해야 할 것 같은 초조함이 들었다. 하지만 여기서 마무리하고 다음 소설을 쓰는 편이 나을 것 같아 멈춰 섰다. 처음 쓴 단편 소설이다 보니 소설의 뼈대부터 잘못되어 더 이상 고쳐도 크게 나아지지 않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어서였다. 그렇게 나는 아쉬움을 남기고 첫 소설 습작을 마쳤다.


소설을 쓰고 싶다고 생각한 건, 작년 어느 날이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일주일에 한 번 브런치에 2~3천 자 정도 되는 글을 꾸준히 올리다가, 글을 조금 더 제대로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쓰기에 조금씩 젖어들었다고 해야 할까. 더 긴 글을 완성해 보는 경험이 하고 싶어졌다. 고등학생이 되기 전에는 종종 소설을 썼던 기억도 나고 해서 소설을 써보자는 마음을 먹었던 것 같다.


다만, 어렸을 때는 정말 마구잡이로 생각나는 글을 썼던 터라 제대로 된 소설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어른이 되고 책을 읽다 보니 눈이 높아져서 그렇게 쓰고 싶지는 않았다. 다른 소설가들이 어떻게 쓰는지 살펴보고 소설 쓰기를 조금씩 배워보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김영하 작가의 온라인 강의를 구입해서 들어보았다. 강의는 이야기를 찾는 법, 인물을 구체화하는 법, 퇴고하는 법 등 소설 쓰기의 상세한 과정을 배울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었고 나는 그 강의의 도움을 받아가며 소설을 써나갔다.






소설 쓰기가 그렇게 녹록한 건 아니었다. 처음 스토리를 떠올려야 하는 시작 단계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스토리를 떠올리는 족족 너무 진부해서 아이디어를 죄다 버려야 했다.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가 생겨도 그걸 스토리에 녹이는 것은 쉽지 않았다. 노트에 수많은 아이디어와 주제들이 생겨났지만, 나는 그걸 수도 없이 버려가며 스토리를 짜냈다. 


그 이후에는 인물을 창작하고 장소와 시대를 만들어내야 했다. 이 단계를 세밀하게 벼려내야 독자들이 인물에 공감할 수도 있고 어떤 장소를 생생하게 느낄 수도 있을 텐데, 경험이 없는 내게는 무척 힘든 작업이었다. 전문 작가들이 소설의 무대를 구체화하고 인물들을 세세히 그려내는 과정들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저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서 할 수 있는 만큼을 해낼 뿐이었다.


초고는 그렇게 만들어 낸 스토리와 장소, 시간, 인물을 바탕으로 해서 어떻게 꾸역꾸역 써나갔다.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구상했던 것들이 하나씩 구체화되는 걸 보는 재미가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퇴고가 기다리고 있었다. 구입한 강의에서는 퇴고를 무척 강조했고, 인내를 가지고 계속해서 여러 번 퇴고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꼭 프린트해서 퇴고를 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한 번 퇴고를 할 때마다 프린트를 했고, 그렇게 해서 A4 뭉치가 책 한 권만큼 쌓이게 된 것이었다.


퇴고하는 과정에서 스토리를 뜯어고칠 수도 있었는데, 나는 그러지는 못했다. 쓸 때는 괜찮아 보였고 고친다 해도 어떻게 고쳐야 할지 방법을 몰랐다. 나는 간신히 인물의 일관성이나 사건의 핍진성들을 채우기에 급급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스토리를 다 고쳐낸 다음에 일관성 등을 신경 쓰는 편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여러 번 퇴고를 하며 소설을 다듬었고, 완성된 소설을 동생에게 읽어봐 달라고 부탁했다.


예상대로(?) 혹평이 돌아왔다. 스토리 자체가 허무하다는 평을 들었다. 내가 다시 읽어보니 플롯에 뼈대가 없었다. 그래서 이야기가 힘이 없었고 갈등 상황도 그다지 긴박하지 않았다.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큰 줄기부터 망한 셈이었다. 그 외에도 주제가 조금 산발적이었다. 너무 여러 주제를 담아내려 욕심을 부리지 않았나 싶다. 그 때문에 오히려 꼭 담아내야 할 주제가 묻힌 것 같아서 아쉬웠다. 그것 말고도 여러 가지 아쉬운 점이 눈에 띄었고 그렇게 내 첫 습작 소설은 실패작으로 남게 되었다.






그렇다고 아쉽기만 한 건 아니었다. 첫 습작부터 성공했으면 아마 나는 지금쯤 천재 소설가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당연한 결과라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내 실패를 받아들였다. 그러고 나니 부족한 부분들이 오히려 자극이 되었고, 그걸 바탕으로 더 좋은 소설을 쓰고 싶어졌다. 게다가 전문 작가들을 흉내 내보는 과정들이 꽤 그럴듯하게 느껴져서 이 작업을 하는 재미도 붙었다. 그래서 나는 요즘 두 번째 습작을 쓰고 있다.


쓰는 경험은 읽는 경험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소설을 읽을 때, 이전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넘어갔던 부분들이 이제는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작가만의 독창적인 인물 묘사라던가 장면을 표현해 내는 기법이라던가 독자에게 감동을 주는 장치들이 조금씩 눈에 띄었다. 소설의 만듦새를 좀 더 의식하게 된 것이다. 특히, 고전 명작을 읽을 때 이런 부분들을 의식하며 읽으면 그야말로 감탄이 쏟아져 나왔다. 지금까지도 읽히는 소설을 쓴 작가들은 모두 굉장한 사람들이라는 걸 이전보다 더욱 해상도 있게 느끼게 되었다.


소설 습작은 내 글을 조금 더 힘 있게 만들어 주기도 했다. 소설은 아직 세상에 없는 세계를 독자에게 전달한다. 그러기 위해서 작가는 세계를 더 자세히 묘사하게 되는데, 습작을 하면서 이런 연습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소설 외에 다른 글에서도 종종 다양한 묘사를 시도할 수 있게 되었고 더 풍부한 표현을 가져다 쓸 수 있게 되었다. 특히 퇴고를 하며 내 글의 부족한 점들을 바로 보고 고쳐나갈 수 있었다. 아마 글을 읽는 분들은 큰 차이를 못 느끼실지도 모르겠지만, 글을 쓰는 나는 조금 더 글에 힘이 생긴 걸 느낀다. 시간이 지나면 글이 훨씬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조금 생겼다.


소설이라는 세계를 더욱 깊이 있게 느끼기도 했다. 소설은 독자가 공감할 수 있는 상황을 눈앞에 보여준다. 그 상황을 통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독자의 마음속에 꽂아 넣는데, 이 주제는 작가의 삶과 경험과 생각들로 이루어져 있다. 소설을 쓴다는 건 이렇게 이루어진 주제를 찾아가는 행위였다. 그리고 그 주제를 드러내기 위한 장치를 만드는 건 예술의 영역으로 보였다. 소설이라는 장르의 주제의식과 예술성을 어느 정도 느껴본 것이다. 그러고 나니 소설이라는 세계가 이전과는 무척 달라 보였다.






고작 한 번의 습작이지만, 배운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소설을 쓰는 건 매우 매력적인 작업이었다. 그래서 두 번째 습작이 실패로 끝나더라도 계속해서 소설을 써볼 생각이다. 그러다 보면 또다시 깨우치는 것이 있을 테고 나의 독서나 글쓰기도 많이 변할 테니 말이다. 내가 쓰는 소설도 점차 나아질지도 모른다.


물론 나에게는 한계가 있다. 하루 8시간 근무하는 직장인이라 온전히 소설에 열정을 다하지는 못한다. 언감생심 프로의 수준을 욕심내는 건 무리가 있다. 문학에 열정을 다 바치는 분들을 떠올려보면, 나는 감히 도달하지 못할 경지라는 생각도 들고 말이다. 하지만 아마추어도 아마추어의 생활을 꾸준히 유지하고 싶은 법이다. 소설 쓰기가 즐겁다는 이유만으로도 계속 소설을 쓸 수 있다. 전문적인 수준에 도달하지는 못하더라도 내가 꾸준히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은 뿌듯하다. 그러니 소설 습작은 계속될 것 같다. 언젠가 내가 납득할만한 수준의 글을 쓰게 되면, 공개해 보는 것도 소소한 꿈이다.


사진: UnsplashDarius Bash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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