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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란 Mar 20. 2022

일에 잠식되는 기분을 아세요?

일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서

9 to 6. 내가 일하는 시간이다. 반드시  시간에 일하지만 결단코  시간에만 일하는  아니다. 나의 일은 출근과 퇴근을 하기 위해 기어코 타야 하는 지하철 안에서도 속세의 때를 씻어 내는 중에도 계속된다.



한동안 일에 잠식된 삶을 살았다. 일은 일상을 조금씩 침략하며 끝내 나를 집어삼켰다. 해내야 하는 일은 불린 미역처럼 불어나고 있었고 대부분 처음 해보는 일이었으며 기존에 하던 일도 계속 쳐내야 했다. 잘하고 싶은데 일은 많고 시간은 부족했다. 어느 수준까지 해내야 진짜 잘했다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모든 일을 어깨에 이고 지고 잠이 드는 순간에도 떨쳐내지 못했다.  혼자만 잘하면 되는 일도 아니야. 외부 협업은  이렇게 진도가  나가는지.  혼자 멱살을 잡고 끌고 가는 상황이지만 나는 한낮 인간에 불과하고 내가 끄는 것은 광화문 광장 세종대왕 동상만큼 무겁고 거대하다. 내가 을처럼 느껴졌고 어느 정도 맞았다.



일이 많아 혼자서  못한다고 말했어야 했나.  일을 나눠 가질 사람이 없고,  일정까지  하면  되는 일이라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이러다가는 일에 휩쓸려  날아가리라. 그때 즈음 숨통이 틔었다. 이글은 일에 잠식되는 기분을 느낀 지난날에 대한 회고이자 훗날 다시 겪을 번아웃에 던지는 위로다.



이럴 거면 야근하지 말지

6 30분에 회사를 나서  근처에 있는 요가원에 도착하면 7 50 요가 수업을 들을  있다. 전날 챙겨둔 요가복은 가방 구석에서 웅크리고 있지만, 오늘도 다시 서랍으로 옮겨질 팔자다. 그렇게 야근이 시작된다.  하나 제대로 끝낸 일이 없어서다. 오늘까지 반드시 끝내야 하는 일은 아니지만 지금 하지 않으면 나는 정말 회사에 회복할  없는 손해를 끼치는 직원이 되고야  거라는 불안함과 함께 일을 계속한다.



야근을 자처했지만 별다른 소득 없다. 사무실에  앉아 있어 봤자 시간만 좀먹을  뻔해 퇴근한다. 얼씨구? 지하철역에 가는 길에 기막힌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뚫어지라 모니터만 쳐다보고 있을 때는 생각나지 않던 문구, 구성, 해결 방안이 뇌에서 뿜어져 나오기 시작해. 자리에 멈춰서서 핸드폰 메모장에 마구  내려간다. 오타가 나든 말든. 그나마 이런 날은 행운이다. 잠드는 순간까지 일과 함께 보냈지만 아무런 진척이 없는 날이면 일어나자마자 머릿속에 욱여넣은 자괴감이  멱살을 잡고 출근길로 이끈다.



 뜨자마자 일해요

재택근무를 하면 지하철에서 보내는 시간을 활용해 자기계발을   알았다. 하다못해 아침이라도 챙겨 먹을  있을  같았지만 경기도 오산. 9시에 겨우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아 줌에 접속해 오늘  일을 말한다. 해야  일은 끝내주게 많은데, 끝이 보이는 일은 없다.



오후 6시에 맞춰 알람이 울린다. 그만 일하라는 신호다. 내가 만들었다. 살포시 끄고 요가복으로 갈아입는다. 출근할  꿈도  꾸던 6 40 수업을 들으러 요가원으로 간다. 아직  일은 많지만 그래도 일하는 시간은 지났으니까.  시간에는 나를 찾는 메시지도 줄어든다.



시원한 수련을 마치고 저녁을 챙겨 먹고 샤워를 하고서는 다시 책상 앞에 앉는다. 그리고 일을 한다. 새벽까지. 보도자료를 쓰고 영상 기획안을 매만진다. 대본을 쓰고 레퍼런스 영상을 캡처한다. 현장에서 촬영팀과 출연자에게 보여줘야 해서다. 그리고 수많은 예외 상황의 대처 방안을 생각한다. 아무리해도 안 끝나는 일이라 눈과 어깨가 무거워지면 노트북을 덮는다.




일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


영상 촬영을 무사히 마치고 부족한 영상을 어떻게 보충할지 머리를 굴려 채워 넣는다. 편집 수정 사항을 정리하고 자막을 수정하고 반영되지 않은 내용을 다시 요청한다. 확인하고 요청하고 확인하고 요청하는 일의 반복이다.  와중에  소스 멀티 유즈라고 영상 내용을 텍스트 콘텐츠로 다시 쓰고 카드 뉴스 구성을 기획하고 디자이너와 디자인 수준에 대해 논의한다.   보도자료도 배포해야지.  맞다 다음 영상 기획도 해야 하는데.



일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약간의 해방감과 눅진한 무기력이 진득하게 눌러 붙어있다. 일은 끝나도 끝난  아니라 시원하게 기뻐하지 못하면서 다음 일을 해야 한다. 애잔한 마음이 든다.  시인의  제목처럼 나는 지구에 돈을 벌러   아닌데,  일이 나를 옭아매는 삶을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인정하고 물러나기

욕심이 컸다. 적당히를 몰라서 나를 괴롭혔고 불쌍하게 만들었다. 이제는 어느 정도 타협하기로 했다. 처음부터 너무 완벽하게 하려고 모든 힘을 쏟지 말기. 부족한 나를 인정하고 동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그리고 나도 도와주자.



일하지 않는 주말 우리 집을 찾아준 조카와 시간을 보내고 다시 사무실에서 동료와 대면 소통을 할 수 있게 됐을 때, 도서관에서 보고 싶은 책을 잔뜩 빌려서 한 권씩 읽어 나갈 때, 새로 산 요가복을 입고 안 되던 자세에 성공했을 때, 그때 비로소 빠져나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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