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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형미 Nov 11. 2023

"오늘도 가세요?"

"네"

내가 자주 가는 '서울숲 클라이밍 뚝섬점'

 워킹홀리데이를 떠나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외국어 공부를 하고 싶다거나 해외 생활을 하고 싶다는 이유는 아니었다. 그저 몸을 움직이는 일이 하고 싶었다. 나의 밥벌이는 그림 그리기이다. 많은 작업 방식 중에서도 주로 컴퓨터로 그림을 그리는데, 그러다 보니  신체에서 가장 격하게 움직이는 부위고작해야 왼손가락들 정도이다(특히나 약지와 검지). 그림을 그리는 일은 너무나도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가장 좋아 보이는 순간을 담고 완성을 하는 순간까지 다양한 가능성을 없애야 하기 때문에 생각을 멈출  없다. 게다가 완성을 했다 해도 과연 이게 진짜 완성인지 끊임없이 질문하게 된. 그런 생활을 지속해오다 보니 점점 안에서 무언가가 고갈되어 간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뇌가 바스락거리고 삐걱거리는듯한 느낌. 노폐물이 가득 쌓여있는 듯한 느낌. 말라간다는 느낌.


 일본 유학 시절 빵집과 맥도널드에서 카운터 알바를 했었다. 손님들이 찾아오면 쉴 새 없이 응대하고, 시간이 비면 주변을 청소하고, 정해진 시간이 되면 다음 날을 위한 준비를 했다. 정해진 루틴대로   없이 몸을 움직이는 일이었다. 물론 진상 손님들을 마주할 때는 스트레스를 받긴 했지만(눈앞에서 바지를 벗는 남자, 돈을 집어던지던 아저씨, 야쿠자 등등등...) 몸을 움직이는  최우선이었던 그때의 감각이 그리웠다. 당장 눈앞에 있는 사람에게 인사하고, 돈을 받고, 계산하고, 물건을 넘겨주고, 청소를 하고, 정해진 시간에 물건을 옮기는 그런 육체적인 감각들이. 하지만 나는 이미 한국에서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힌 사람이었기 때문에 명분 없이 일을 그만두기엔 두려움이 컸고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그래서 만약 워킹 홀리데이를 가게 된다면 그림을 멈출  있는 일종의 명분이 되어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용기가 없던 나는 워킹홀리데이를 신청조차 하지 못했지만.


 그림을 쉬지 않아서였을까? 크게 번아웃을 겪었다. 펜을 쥐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고, 손이 차가워지고, 떨리고, 눈물까지 뚝뚝 떨어졌다. 모든   의지와 상관없이 벌어졌다. 어찌어찌 겨우겨우 일상으로 복귀하긴 했지만 어쩐지  자신이 깨진 그릇처럼 느껴졌다. 깨진 그릇이 다시 붙지 않는 것처럼 깨진 내면도 붙지 않는다는 걸 그때 알았다. 벌어져있는  사이로 쉴 새 없이 무기력함이 흘러나왔다. 조금이라도 마음을 놓는 순간 다시 펜을 들 수 없게 될 것 같았다. 어쩌면 나란 인간은 이미 망가진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현실은 망가진 사람이 회복할  있는 충분한 시간을 주지 았다. 그저 아슬아슬하게 하루하루를 보낼 뿐이었다.




 어느 날 지인이 갑자기 sns 영상을 올리기 시작했다. 알록달록한 무언가가 잔뜩 달려있는 벽에 매달려서 아주 천천히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알록달록한  무언가를 잡고 위로, 옆으로 이동하고 있었는데  하고 있는 것인지 신기하긴 했지만 흥미롭게 보지는 않았었다. 그저 특이한 운동을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도 지났을 ,  지인의 등에 나비가 보이기 시작했다. 비록 홈트레이닝이었지만 나도 한창 운동을 열심히  때였고, 갈라지는 근육에 대한 동경이 생기던 시기였기 때문에 갑자기 그 운동에 대해  흥미가 생겼다. 듣자 하니 '클라이밍'이라는 운동이라고 했다. 원데이 클래스를 듣고 싶었지만 당시 살던 동네의 클라이밍장은 주말엔 수업을 하지 않았고, 평일에는 일정을 맞추는 것이 녹록지 않았다. 겨우겨우 일정을 맞추었을  코로나가 심해지면서 자연스럽게 흐지부지 되었다. 그러다 서울로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무심결에 클라이밍장을 검색해 보았더니 마침  근처에  개의 클라이밍장이 있는  아닌가. 어느 곳을 가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시간이 맞는 원데이 클래스가 있는 곳에 가게 되었다. 처음 수업을 듣고 나서는 솔직히 이게 무슨 재미인지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저 돌을 잡고 위로 오르기만 하는데 대체 사람들은 왜 이렇게 열광하는 것인 의문이 들기까지 했다. 하지만 나만  재미를 모른다는  너무나도 섭섭했기 때문에 의무적으로 주말마다 클라이밍장에 갔다. 나만의 'Getting to know' 기간이었달까. 


 아는  없어도 일단 매달리다 보니 힘이 생긴 건지 실력이 늘긴 늘어서 노랑 레벨까지는 가게 되었다.(참고로 내가 가는 곳은 레벨을 무지개 색으로 표시하고 빨강부터 시작한다). 노랑 레벨을 어느 정도  하고 나니 자연스레 녹색 레벨이 해보고 싶어 졌다. 노랑은   아니까 녹색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며 벽에 어보았. 결과는 실패. 팔이 닿지 않았다. 이상했다.  팔을 뻗었는데 팔이 닿지 않지? 그럼 저건 대체 어떻게 잡는 거지? 머릿속이 너무 혼란스러웠다. 마침 어떤 여성 분이 내가 실패한 녹색 레벨에 도전하셨고 그분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그냥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상체를 틀고 내가 이해할  없는 방향으로 다리를 움직였는데 몸이 위로 쑤욱하고 올라가더니 내가 잡을  없던  돌을 잡는 것이 아닌가! 분명 나랑 키도 비슷한 분이었는데  돌을 잡다니!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자극을 받고 다시 한번 벽에 붙어보았지만 역시나 나는 실패했다. 그 방법은 대체 뭐였을 호기심이  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그때 '배워봐야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나도  기술을 써보고 말리라. 그리고 다음 달에 바로 클라이밍 스타터반 수업을 등록했다.




 어느덧 수업을 듣고 클라이밍을 제대로 시작한 지   정도가 되어간다. 그때  문제는 사라져서 더 이상   없지만 아웃사이드, 인사이드, 크로스 카운터... 많은 기술들을 배우고(배운 것과   있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지만) 이제는 초록 다음인 파랑 레벨 도전하고 있다. 손에 홀드가 잡힐 때의 느낌, 몸을 끌어올린 후 느껴지는  근육의 열감, 앉아서 작업을 할 때는 느끼지 못했던 부위가 움직이는 신선함 등 모든 것들이 내가 원했던 '신체를 움직이는 감각'을 최대치로 느끼게 해 주었고 나는 금세 이 운동에 빠져들었다.


 정답이 눈앞에 보인다는 것도 클라이밍을 좋아하게  이유  하나이다. 그림은 정답 도무지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정답인지조 차도 모를 때가 허다하다. 하지만 클라이밍은 언제나 탑이라는 골이 존재하고 나는 어떻게든 룰을 지켜 탑까지 올라가면 된다. 이렇게도 명쾌할 수가 없다.


 처음 클라이밍을 시작했을 때는 온몸을 두들겨 맞은  같은 느낌이 생소하고 힘들었지만   감각들을 좋아하게 되었다. 내가 그리워했던 몸을 움직이는 감각이었으니까. 헬스도 몸을 움직이기는 마찬가지이지만 클라이밍이 특별하게 다가왔던 건 덤벨이나 기구를 사용하지 않고 내 몸의 힘으로 내 몸을 끌어올린다는 , 그리고 무섭다는 (사실 이게 제일 큰 것 같다) 조금 더 ‘생활’에 관련 움직임이라 느껴졌기 때문인 것 같다. 헬스보다 직관적이고 본능적이짜릿하달까. 그리고 벽에 붙어있을  다른 생각을  여유 없다. 다른 생각을 한다는 것은 추락이니까. 터질 것 같은 전완근과 아려오는 삼각근, 까딱하면 떨어질 것 같은 불안함, 공포심과 싸우다 보면 현실에서 나에게 붙어있던 스트레스와 잠시나마 이별을 하게 되는 느낌을 받는다. 쉴 새 없이 나를 채찍질하는 것 같다. 클라이밍을 시작한 후로 몸이 아프지 않았던 적이 거의 없다. 늘 몸 어딘가엔 근육통이 있다. 피부가 쓸려서 까지고, 피가 나고, 다리 여기저기에 멍이 들고, 발목을 접질리고, 손가락 관절이 욱신욱신 아파온다. 가끔은 일상생활에 불편함을 느끼게도 하지만 나는 이 감각이 너무나 좋다. 그림만 그려서는 절대로 느낄 수 없는 새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느끼고 싶었던 몸을 움직이는 감각을 이곳에서 느낀다. 머릿속에 다시금 수분을 채워 넣는 기분이 든다. 때로는 내면이 깨진 걸 뇌가 눈치채기 전에 몸을 깨버리는 속임수를 쓰는 건가 싶을 때도 있긴 하지만 적어도 벽에 머무는 시간만큼은 나는 현실에서 해방될 수 있다. 그래서 최근엔 깨진 틈 사이로 무언가가 스멀스멀 흘러나올 때마다 씩씩거리면서 클라이밍장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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