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킹홀리데이를떠나고싶었던적이있었다. 외국어공부를하고 싶다거나해외생활을하고 싶다는이유는아니었다. 그저몸을움직이는일이하고 싶었다.나의밥벌이는그림그리기이다. 많은작업방식중에서도주로컴퓨터로그림을그리는데, 그러다 보니내신체에서가장격하게움직이는부위는 고작해야왼손가락들 정도이다(특히나약지와검지). 그림을그리는일은너무나도많은생각을불러일으킨다. 가장좋아 보이는순간을담고완성을 하는순간까지다양한 가능성을 없애야 하기 때문에생각을멈출수없다. 게다가완성을했다 해도과연 이게진짜완성인지끊임없이질문하게 된다. 그런생활을지속해오다 보니점점내 안에서무언가가고갈되어 간다는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뇌가바스락거리고삐걱거리는듯한느낌. 노폐물이가득쌓여있는 듯한느낌. 말라간다는느낌.
일본유학시절빵집과맥도널드에서카운터알바를했었다. 손님들이찾아오면쉴 새 없이응대하고,시간이비면주변을청소하고, 정해진시간이되면다음날을위한준비를했다. 정해진루틴대로쉴새없이몸을움직이는일이었다. 물론진상손님들을마주할때는스트레스를받긴 했지만(눈앞에서바지를벗는남자, 돈을집어던지던아저씨, 야쿠자등등등...) 몸을움직이는게최우선이었던그때의감각이그리웠다. 당장눈앞에있는사람에게인사하고, 돈을받고, 계산하고, 물건을넘겨주고, 청소를하고, 정해진 시간에 물건을옮기는그런육체적인감각들이. 하지만나는이미한국에서어느 정도자리가잡힌사람이었기때문에명분 없이일을그만두기엔두려움이컸고많은용기가필요했다. 그래서만약 워킹홀리데이를 가게 된다면그림을멈출수있는일종의명분이되어줄수있을거라고생각했다. 물론용기가없던나는워킹홀리데이를 신청조차 하지 못했지만.
그림을 쉬지 않아서였을까?크게번아웃을겪었다. 펜을쥐는것만으로도숨이막히고,손이차가워지고,떨리고,눈물까지뚝뚝 떨어졌다. 모든일은내의지와상관없이벌어졌다. 어찌어찌 겨우겨우일상으로복귀하긴했지만 어쩐지나자신이깨진그릇처럼 느껴졌다.깨진그릇이다시붙지않는것처럼깨진내면도붙지 않는다는 걸 그때 알았다.벌어져있는틈사이로쉴 새 없이무기력함이흘러나왔다. 조금이라도 마음을 놓는 순간 다시 펜을 들 수 없게 될 것 같았다.어쩌면나란인간은이미망가진게아닐까 하는생각이들었다. 하지만현실은망가진사람이회복할수있는충분한시간을주지않았다. 그저 아슬아슬하게하루하루를보낼뿐이었다.
어느 날지인이갑자기 sns에영상을올리기시작했다. 알록달록한무언가가잔뜩달려있는벽에매달려서아주천천히몸을움직이고있었다. 알록달록한그무언가를잡고위로, 옆으로이동하고있었는데뭘하고있는것인지신기하긴했지만흥미롭게보지는않았었다. 그저특이한운동을한다고생각했다. 하지만한달정도지났을때, 그지인의등에나비가보이기시작했다.비록 홈트레이닝이었지만 나도한창운동을열심히할때였고, 갈라지는근육에대한동경이생기던시기였기때문에갑자기그 운동에 대해 큰흥미가생겼다. 듣자 하니 '클라이밍'이라는 운동이라고했다.원데이클래스를듣고 싶었지만당시살던동네의클라이밍장은주말엔수업을하지않았고,평일에는일정을맞추는것이녹록지않았다. 겨우겨우일정을맞추었을땐코로나가심해지면서자연스럽게흐지부지되었다. 그러다서울로이사를하게 되었는데무심결에클라이밍장을검색해 보았더니마침집근처에두개의클라이밍장이있는게아닌가. 어느곳을가야 하나고민을하다가시간이맞는원데이클래스가있는곳에가게되었다. 처음수업을듣고 나서는솔직히이게무슨재미인지전혀느끼지못했다. 그저돌을잡고위로오르기만하는데대체사람들은왜 이렇게열광하는것인지의문이들기까지했다. 하지만나만그재미를모른다는게너무나도섭섭했기때문에의무적으로주말마다클라이밍장에갔다. 나만의 'Getting to know' 기간이었달까.
아는게없어도일단매달리다 보니힘이생긴 건지실력이늘긴늘어서노랑레벨까지는가게되었다.(참고로내가가는곳은레벨을무지개색으로표시하고빨강부터시작한다). 노랑레벨을어느 정도다하고 나니자연스레녹색레벨이해보고 싶어 졌다.노랑은할줄아니까녹색도가능하지않을까? 하며벽에붙어보았다. 결과는실패. 팔이닿지않았다. 이상했다. 왜팔을뻗었는데팔이닿지않지? 그럼저건대체어떻게잡는거지? 머릿속이너무혼란스러웠다. 마침어떤여성분이내가실패한녹색레벨에도전하셨고그분을유심히관찰했다. 그리고깜짝 놀랐다. 그냥올라가는것이아니라상체를 틀고내가이해할수없는방향으로다리를움직였는데몸이위로쑤욱하고올라가더니내가잡을수없던그돌을잡는것이아닌가!분명나랑키도비슷한분이었는데저돌을잡다니!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광경이었다. 자극을 받고 다시 한번 벽에 붙어보았지만 역시나 나는 실패했다. 그 방법은대체뭐였을까호기심이생겼고하고 싶다는욕심이생겼다. 그때 '배워봐야겠다'라는 생각을했다. 나도저기술을써보고말리라. 그리고다음 달에바로클라이밍스타터반수업을등록했다.
어느덧수업을듣고클라이밍을제대로시작한 지세달정도가되어간다. 그때그문제는사라져서더 이상풀수없지만아웃사이드, 인사이드, 크로스카운터... 많은기술들을배우고(배운것과할수있는것은완전히다른것이지만) 이제는초록다음인파랑레벨에도전하고 있다.손에 홀드가 잡힐 때의 느낌, 몸을 끌어올린 후 느껴지는 근육의 열감, 앉아서 작업을 할 때는 느끼지 못했던 부위가 움직이는 신선함 등 모든 것들이 내가 원했던 '신체를 움직이는 감각'을 최대치로 느끼게 해 주었고 나는 금세 이 운동에 빠져들었다.
처음 클라이밍을 시작했을 때는온몸을두들겨 맞은것같은느낌이생소하고힘들었지만 곧그감각들을좋아하게되었다. 내가그리워했던 몸을 움직이는 감각이었으니까. 헬스도 몸을 움직이기는 마찬가지이지만 클라이밍이 특별하게 다가왔던 건 덤벨이나 기구를 사용하지 않고 내 몸의 힘으로 내 몸을 끌어올린다는 것, 그리고 무섭다는 것(사실 이게 제일 큰 것 같다)이 조금 더 ‘생활’에 관련 움직임이라 느껴졌기 때문인 것 같다. 헬스보다 직관적이고 본능적이고 짜릿하달까. 그리고 벽에붙어있을땐다른생각을할여유가없다. 다른생각을한다는것은곧 추락이니까. 터질 것 같은 전완근과 아려오는 삼각근, 까딱하면 떨어질 것 같은 불안함, 공포심과 싸우다 보면 현실에서 나에게 붙어있던 스트레스와 잠시나마 이별을 하게 되는 느낌을 받는다. 쉴 새 없이 나를 채찍질하는 것 같다. 클라이밍을 시작한 후로 몸이 아프지 않았던 적이 거의 없다. 늘 몸 어딘가엔 근육통이 있다. 피부가 쓸려서 까지고, 피가 나고, 다리 여기저기에 멍이 들고, 발목을 접질리고, 손가락 관절이 욱신욱신 아파온다. 가끔은 일상생활에 불편함을 느끼게도 하지만 나는 이 감각이 너무나 좋다. 그림만 그려서는 절대로 느낄 수 없는 새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느끼고 싶었던 몸을 움직이는 감각을 이곳에서 느낀다. 머릿속에 다시금 수분을 채워 넣는 기분이 든다. 때로는 내면이 깨진 걸 뇌가 눈치채기 전에 몸을 깨버리는 속임수를 쓰는 건가 싶을 때도 있긴 하지만 적어도 벽에 머무는 시간만큼은 나는 현실에서 해방될 수 있다. 그래서 최근엔 깨진 틈 사이로 무언가가 스멀스멀 흘러나올 때마다 씩씩거리면서 클라이밍장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