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넷플릭스에! 헤어질 결심, 각본집 읽고 나면 더 깊어지는 영화
헤어질 결심(2022)
빛나는 호기심, 살아가며 만난 일들 앞에 꼿꼿해온 모습. 동류임을 알아보고 관심을 갖게 되지만, 용의자인 서래에게 다가갈 수 없는 해준. 확신에 가까운 의심을 하는 와중에도 걱정되고 신경 쓰이는 여자의 집 앞에서 잠복근무를 하며, 그 여자의 움직임을 지켜보면서야 나른하게 깊은 잠에 드는 남자.
자신 때문에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 온 모든 것을 포기한 해준의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영원히 가져갈 사랑에 빠지는 서래. 사랑하는 남자의 마음에 영원히 미결로 남고 싶은 여자.
매일 저녁을 거르는 여자에게 남자는 밥을 해주고, 잠을 이룰 수 없는 남자를 여자는 재워준다.
<헤어질 결심>은 2022년에 개봉한 영화 중 <탑건: 매버릭>,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앳원스(에에올)>와 함께 가장 훌륭했다. 우아하고 문학적이며 서정적인 분위기, 완벽한 미장센, 칙칙하고 허름한 취조실 화장실 타일 너머 거울에 비추는 양치 모습조차 아름답게 보이게 만드는 박찬욱 매직, 교과서적으로 충실하게 지루함 없이 기승전결이 이어지는 능숙한 전개.
신기하게도 볼수록 재미있고 좋은 영화고, 각본집을 읽고 나서 더 좋아졌다. 두 번을 봐도 재미있는 영화였고 각본집을 읽고 난 후 마지막으로 본 게 가장 좋았다. 활자로 읽은 어떤 말의 토씨를 잘 잊지 않는 편이라서, 원래는 각본집을 필사적으로 보지 않으려고 했었다. 보고 나면 영화 다시 볼 때 재미없을까 봐. 그런데 이 영화는 왜 대사를 모두 읽어보고 난 후 다시 봤을 때 더 재미있었을까.
좀 덜 잘 만든 영화여도 남녀 주인공에게 몰입이 잘 돼서 좀 더 완성도가 미화되는 영화가 있는데, 이 영화의 경우에는 반대로 느끼는 사람도 많은 것 같다. 영화 자체는 선술했듯 너무 완벽하게 좋은데, 로맨스 영화임에도 남녀 주인공의 사랑의 감정에 내 템포를 똑같이 맞춰서 이입해가기 어려운 면이 있었다. 만약 누군가 또 이 영화의 감정선에 완벽하게 이입되지 않았다면 이유는 대충 이런 것들 같다.
1. 중년의 사랑 속도가 머리로는 이해가 가는데 아직 몸으로 되지 않아서.
박해일처럼 정장 입고 반듯한 중년의 사람이 어떤 여자에게 이렇게까지, 아무 실제 주고받은 물리적 교류 없이 첫눈에 이 정도까지 반한다는 게, 내 옆에서 해죽거리고 있는 저 놈이라면 이해가 되는데 박해일이 너무 반듯하게 연기해서. 그런데 '그런 사람이 이렇게까지 "붕괴"되었다'가 또 이 사랑의 핵심이기도 하다.
젊은 날에 사람 많이 만났으니 중년의 남녀 뭐 여러 말 안 나눠봐도 한눈에 빡 알아볼 수 있다는 것도 너무 알겠긴 한데...... 그것도 그렇다는 것을 깨달은 건 각본집을 읽고 난 후였다. 영화관에서 처음 볼 때는 사실 해준이 서래한테 반했다는 것을, 해준이 서래 집 앞에서 잠복하면서 지켜볼 때도 잘 체감을 못했다. 나도 모르게 대사를 엄청나게 못 들은 채 지나쳤기 때문이었다.
2. 스릴러인 줄 알고 봐서. 귀가 잘 안 들려서.
취조 중에 초밥 사주고, 향수 내음을 맡고 서로 반지의 유무를 보고 반창고를 건네고, 이런 부분을 교감이라고 느끼지 않고 스릴러의 단서들로 받아들였었기 때문이다. 감정선이 멀티가 안 돼서 스릴러인 줄 알고 보는 와중에 둘이 주고받는 눈빛이나 말을 많이 놓쳤고 각본집을 보니 내가 탕웨이의 대사를 엄청나게, 거의 못 알아듣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어찌 되었든 살인범이라고 생각한 사람에 대해, 또 기혼이라고 생각한 사람인데 이렇게까지 못 잊고 좋아하기에는 구실이 너무 모자란 느낌. 그럼에도 사랑은 뭐 이유도 없고 운명인 거라 빠질 수 있다는 건 알겠는데 그렇다기에는 또......
3. 박해일이 그렇게까지 멋있지 않아서.
아니 이건 배우님을 까자는 게 아니고...... 내가 느끼는 멋있음은 아닌 것 같다. 나는 이 영화를 시월애처럼 느끼기는 어려웠다. 취조 중에 반해서 잘해주는 멀끔한 아저씨...... 나는 그냥 그 이상으로 몰입하기가 어려워서. 물론 서로의 결핍을 채워주는 존재가 되지만, 외롭던 서래의 마음에 가닿는 따뜻한 동류의 남자로 느끼기엔 대사톤도 너무 한산 때부터 저음의 울림통 좋은 교과서 톤이셔서 좀 와닿지가......
4. 외국인이기에 어색한 말투를 쓸 거라고 생각하고 넣은 대사들에서 "나 장치예요"라고 말하는 것 같은 희미한 작위성을 느껴서
"산에 가서 연락이 안 되면 걱정했어요. "마침내" 죽을까 봐."
"내 이야기를 듣고 울어준 "단일한" 외국인"
이 부분들이 원래는 더 와닿고 좋아야 하는데 나는 오히려 작위적으로 느껴지고 어색했다. 대사가 모두 문어체이고 문학적이어서 우아하고 서정적인 분위기가 배가되지만, 글쎄 "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라는 말을 누가 현실에서 구두로 뱉는단 말인가......? 그게 의도인 것도 알겠으면서도 왠지 멀어지는 포인트들인 것이다.
하여 정리해 보면 내가 처음 이 영화가 너무 좋았지만 남녀의 감정선 자체에는 큰 감흥을 못 느꼈던 것은 핸드크림 발라주며 "내가 왜 서래 씨 좋아하는지 말했나?"라는 류의 말을 하는 아저씨에게 전혀 매력을 느끼기 어려운 취향(느끼함, 길라임 씨는 언제부터 그렇게 이뻤나? 를 생각함), 또한 아직 인생의 중후반 단계까지 못 갔다는 점, 그리고 결정적으로 다량의 대사를 못 알아들었기 때문인 것 같다.
각본집으로 본 헤어질 결심은, 사무적이고 효율적인 단어들을 골라서 쓴 지문들조차 왠지 문학적이고 좋았다. 그리고 원래는 머리로도 이해 안 되던 감정선이 머리 한정으로는 완벽하게 이해되었다. 그리고 크고 작은 떡밥과 설정들이 진짜 치밀하다. 정말이지 여러모로 완벽한 각본이었다.
만약 이 영화가 남들이 좋다는 만큼 마음이 아릿하면서 좋지 않았거나, 로맨스 영화로 흠뻑 젖어 이해하고 싶은데 자꾸만 '서사가 차곡차곡 좋은 스릴러 영화'로 보여서 아쉬운 사람이 있다면 각본집을 읽어볼 것을 강력히 추천한다. 우리의 생각보다 이 영화의 대사는 잘 안 들렸고, 넷플릭스의 한국어 자막기능은 매우 유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