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랄라 Mar 07. 2024

오래된 인연의 숙제, "안녕"

패스트 라이브즈


인연이란 애쓰고 발 굴러봤자 인간의 의지가 크게 작용하지 못하는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그날 그 순간에는 그 사람이 만나기 싫었던 것조차 그냥 인연이 거기까지라고 생각한달까.


[! 스포 유의 !]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한 공간과 한 타임에 공존하던 리커 바에서의 장면에서도, 리커 바 이후 결말까지 이어진 장면들에서도 말하고 싶은 것은 모든 게 거기까지라는 것, 이제 '안녕'이라는 숙제를 뒤늦게 끝마쳐야 할 '거기까지인 인연'이라는 것. 


오래된 인연의 숙제였던 "안녕."인 것이다. 




나는 사랑꾼이지만 사실 이런 식으로 몇 번 실제 교류도 없던 첫사랑 얘기 감정선에는 거의 공감하지 못한다. 일화나 대화들에 너무, 타인에겐 그리 인상적이지 않을 한 개인의 구체적 경험이 심하게 드러나보여 몇 군데에선 눈을 질끈 감기도 했다. 사랑에 빠진 중이어서 세상 모든 말이 의미로운 친구의 연애서사 얘기 들으면서 카페에서 하품하는 느낌. 연예가중계에서 두유노우김치 보는 느낌도 아주 조금 한 스푼.


외국어 필터라도 한 겹 끼웠으면 이 김치에서 치환된 ‘인연’의 낯간지러움이 조금 덜 느껴져 고통이 덜했을 텐데. 눈을 질끈 감는 순간마다 ’대충 생활때 묻고 조용해서 독립영화 느낌 나는 영화들의 예술성은 과대평가 되는 경향이 있어‘라고 생각도 했던 건 비밀.



그래도 힙스터 색채 나는 그림들은 예뻤고, 라이카 시네마 에서 보면 사부작 사부작거리는 소리도 다 예쁘게 들려서 뭐든 재밌고, 연애 얘기는 재미없어도 재밌지 뭐. 


뚝뚝 끊기는 통신 중 서로를 기다리는 느낌도 잘 표현되었고, “와 너다”라는 말도 예쁘고. 울보였던 열 두살이 어른이 되어서는 울지 않다가, 울 때 지켜봐 주는 사람이 비로소 인수인계 되는 것 같던 계단 장면도 예뻤고.



두 배우는 너무 훌륭하다. 스틸컷만 보고 우와 진짜 리마리오 같다고 생각했던 유태오 배우 너무 잘생겼고 매 순간 섬세하다. 도저히 졸업반으로 보기 어려운 순간조차 혼신의 덮머와 풋풋한 말투로 상쇄함. 억양과 띄어 읽기가 신기하다고 생각하면서 봤는데 한국어가 모국어가 아니라니 너무 놀랍다! 영어가 힘든 한국인 말투 언어천재 아니냐능. 기하핰 님은 왜 낮술 안 드시고 거기서 나오냐능. 그레타 리 배우도 눈빛이나 작은 몸짓으로 너무 많은 메시지를 전하고, 목소리도 아름답다. 


유태오 배우 연기에 무엇보다 감탄했던 부분은, 노라가 연락을 끊자고 했던 대학생 시절에, 실제 만난 적도 없던 성인끼리의 연애가 그렇게 종결되는 대목에서 스스로도 그 단절의 슬픔을 어이없어하며 "아... 내가 왜 이러지?"라고 하는 부분이었다. 내가 일생 동안 모든 미디어를 통틀어서 본 연기 중 거의 세 손가락 안에 들게(아니 어쩌면 가장) 소름 돋는 생활 연기였다.




사실 난 영화 속 노라처럼 "나는 성공하고 말 거야. 그러니 너랑 이렇게 얼굴도 보지 못하고 연락하는 게 너무 힘들어, 그러니까 아예 우리 연락 끊어." 이런 류의 연락차단 선언은 늘 신기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성공을 해야 해서라면 나는 세상에서 사랑이 제일 중요한 자잘한 무지렁이여서 어떤 과정에서도 내 생활을 희생하면서까지 성공으로 올라가야 한다는 걸 이해할 수 없고, 관심이 없으면 연락을 그냥 자연스럽게 안 하면 되는 거다. 아무리 나 자신만큼 사랑했던 누군가라고 해도 헤어진 연인이 SNS나 카톡에서 사진조차 보기 힘들 정도로 힘든 적이 없다. 굳이 차단을 해서 눈에 안 보이게 만들어도 그 사람은 거기 있는데, 차단을 한다고 힘들지 않은 것도 아니고, 덜 보여서 덜 힘든 건 그냥 고통의 회피에 불과한 거 아닌가 싶어서 왜 차단을 하는지 아직 잘 모르겠다. 그렇다 보니 감정선들에 당연히 공감은 안 되는데, 영화 속 고민들은 좋았다. 결혼한 남편이 나타났던 그 모습대로 다른 사람이 그 순간에 나타났다면? 잠깐 스쳐도 교감을 깊게 느끼는 해성이와 노라에게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었다면?




아쉬운 점은


1.

어린 시절은 아예 안 나오거나 어떤 세련된 다른 방법의 플래시백이었다면 어땠을지. (단순하게 기술 쓰지 않는 게 오히려 의도적인 세련됨을 추구하려는 의도 같지만 / 그리고 한국 영화들에 비해 아역 연기가 너무너무 자연스러운 건 감탄스러움)


2. 

조금 더 잘 쓴, 관계에 대한 대사들이 있었다면. (기억에 남는 대사가 거의 없다. 이것도 의도일 수도 있겠지만 남녀가 나누는 대화나 남편과 나누는 대화나 관계 철학은 너무 평범하고 자기들 세계에서나 웃기고 신기한 수준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내레이션으로 깔리는 두유 노우 인연은 한국인의 손발을 미치게 만든다)

-하지만, 사실 학창시절 공부 1,2등 한 남녀도, 부푼 꿈을 안고 큰 바다로 나가 어린 시절 고생하며 무언가를 쌓은 사람들도 결국 저 나이쯤 되면 그저 매일 평범하게 살아가는 게 삶의 보통 진리이다. 그게 영화의 큰 주제처럼 보이기도 해서.



3.

작법이 신기한 장면도 가끔 보인다. 뭐라고 설명은 못하겠고 너무 주관적인 감상인데 중학생이 쓴 판타지 연애소설처럼 느껴지는 대목이 가끔 보인다. 갑자기 술자리에 친구들이 모여있는데 너무 작위적이어서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대충 상상한 '한국 남자 대학생 4명의 술자리' '한국 직장인 배꼽 친구 남자 4명의 술자리'처럼 보인다.  -그 작위적임을 그나마 해소해 주는 게 기하핰 형님임

시작 장면에서 보여주는 "저들은 무슨 관계일까?"도 너무 작위적으로 예술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감성 중 하나임





패스트 라이브즈는 현재 장안의 화제다. 아마도 '인연'이라는 한국인에게는 지나치게 일상인 개념이 서양권에서는 흥미로울 수도 있겠고, 사실 두 배우의 작은 표정이나 눈빛연기들이 한국인에게는 다소 힘들 수 있을 오글거림을 꽤 많이 상쇄할 정도로, 강렬하게 훌륭하다. 



이동진 평론가님께서 진행하신 셀린 송 감독님 인터뷰 영상. 이동진 평론가의 훌륭한 인터뷰 진행도 너무 좋지만 개인적으로 영화에 대한 선호와 별개로 셀린 송 감독님이 너무 밝고 유쾌하고(<넘버3>감독님의 따님이다. 어린 시절 자전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쓴 시나리오라고 하심), 인터뷰 자체가 너무 재미있어서 흥미롭게 봤다. 영화 본 사람에게는 영화 본편만큼이나 재미있던 인터뷰


https://youtu.be/OC2Di9oz21w?si=BinFI8gUieHFLZfd


작가의 이전글 나의 이야기는 내가 쓰겠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