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인지 모를 어느 시간에)
낮잠을 잤다. 꿀 같은 잠을. 고등학교 때도 난 잠을 자야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외부 활동의 부산함을 꾸역꾸역 꿈속에 집어넣어야 할 수 있었다. 그게 무엇인가. 체력 탓인가? 아니면 내 에너지 프로세스 때문인가. 일단 자고 나면 모든 건 리셋됐다. 공부를 할 수 있는 잠잠한 모드로 전환됐다. 머리가 맑아지고 허벅지에 힘이 불어났다. 상쾌함. 이 두 가지 에너지 모드 사이를 교차하듯 난 낮잠을 이용한다.
6월 2일
글의 날짜를 적지 않아도 기억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난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다. 나의 기억은 희미하게 각인되듯이 새겨지고 더 깊게 파여 기록되는 프로세스가 아니라 기름처럼 휘발된다. 완벽하게 사라진다. 기억에 닻을 내릴 수 있다면 난 최대한 많은 것을 기억하고 싶다. 물고기처럼 생생한 단어나 기뻤던 일들을. 친구들과 나누었던 이야기나 그들의 사건을. 누군가 한때의 일을 상기할 때 나 역시 생생하게 기억하며 미소 짓고 웃고 싶다. 나의 건망증. 그러나 그 증상은 고맙게도 망각의 세계에서 나를 보호한다. 망토를 두른 기사단. 흑마를 타고 온 창과 방패. 그 뒤에서 난 이 미약한 심신의 약점을 가리며 평화의 시대를 살아간다. 그러니 이 배은망덕한 상상은 이제 접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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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우리 아파트에서 나는 쿰쿰한 냄새가 좋다. 음식 냄새. 오래된 가구 냄새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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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밝았다면 더 많은 글을 읽을 수 있을 텐데 눈이 침침해진 게 난 나이 들어 변한 것 중에 가장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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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시간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다. 더디게 흐르는 시간을, 죽음을 기다리는 노인처럼. 어떠한 주어진 일도 없이 시간은 초침 하나하나의 속도로 흘러간다. 1초, 1분, 한 시간, 하루. 당신이여. 알다시피 난 지금 백수다. 백수의 시간은 노인의 시간과 같다. 난 자유라는 잠시 동안의 환희를 경험하고, 곧바로 늙어버렸다. 내게 묻고 싶다. 그건 불행일까. 아니면 인생 최후의 숙제를 푸는 경건한 시간일까. 시간은 무엇일까. 난 그 문제를 머리에 담고 매일같이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