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9세 소녀의 나 홀로 유학 생활 - #2]
설마 똥은 아니겠지? 내 정수리에 툭 하고 몰려오는 따뜻함이 설마 공룡의 똥은 아닐 거야. 그럼. 그렇고말고. 거실에 있던 그 공룡 자식이 내 머리에 똥을 싸진 않았을 거야. 거짓말.
만 9년 동안 기껏 해봐야 다른 사람의 침이나 몸에 좀 묻을 수 있었겠지, 아니면 신발 신고 강아지 응가나 밟아봤겠지. 누가 응가를 몸에, 그것도 머리 한가운데 정수리에 맞을 생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놀란 마음에 한껏 눈을 크게 뜨고 몇 번을 깜빡이다 가만히 검지 손가락을 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머리에 가져다 대고 그 근처를 맴돌던 게 몇 분. 큰맘 먹고 콕하고 정수리에 검지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이런... 맞네 응가. 공룡이 내 정수리에 응가를 싸다니... 어떡해!
앞서 말했지만 내가 살던 곳은 산속 마을이었다. 너무 어렸을 때라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오랫동안 차를 타고 들어가야지만 우리 마을에 도달했다. 마치 잘 가꾸어진 큰 정원처럼 양 옆 길가에는 초록잎들이 무성한 나무들이 줄지어 심어져 있고 조금만 눈을 돌려도 온갖 들꽃들, 알 수 없는 큰 풀잎이 우거진 곳, 그야말로 자연 천국이었다. 우리 집은,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유학을 했던 어학원은, 마을 입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집이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선 후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던 테니스코트를 지나 양 옆으로 줄지어진 단독 주택들을 몇 가구 지나 걷다 보면 나오는 우리 집. 지금의 내가 될 수 있도록 상상력과 사고력을 우주만큼 크게 넓혀준 우리 집. 필리핀 스타일의 집이었기 때문에 신발을 벗는 곳은 집 밖에 있었는데 그곳까지 대문부터 기다랗고 좁은 길을 지나야 했다. 옆에는 네모난 큰 공터에 잔디가 무성했다. 정원이지만 딱히 정원이라고 할 수는 없는 그런 곳. 아마 그래서 그랬나 보다. 집 안 곳곳 공룡이 쉽게 발견될 수 있었던 이유가.
21세기에 무슨 공룡인가 싶을 거다. 사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공룡은 당연히 아니다. 다만 공룡의 모습을 꼭 빼닮은 도마뱀이 집 안 곳곳 벽에 붙어있었다. 언뜻 봐도 성인 여성의 손부터 팔꿈치 정도의 길이만 한 도마뱀이 집 벽에서 기어 다니며 함께 생활했다. 아마 외곽에서 자란 사람들에게는 집 안에 여러 생물들과 사는 게 익숙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서울에서 태어나 인천에서 자란 소녀에게는 전혀 익숙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특히나 내가 자란 곳은 우리가 흔히 보던 빌라와 아파트였기 때문에 벽에 도마뱀이 있다는 것은 애완동물로 키우던 것이 탈출한 경우가 아니면 절대 경험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필리핀은 집 안에 도마뱀이 있는 것이 꽤나 흔했다. 한두 마리 정도야 너무 흔해서 신경도 쓰이지 않을 정도이고 비가 오거나 날씨가 좀 궂은날이면 집안에 온통 "옥옥- 옥옥-"하는 도마뱀 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래서 우리는 도마뱀을 '옥옥'이라고도 불렀다.
이 옥옥이 나를 공격한 것이다. 매일 주어진 공부 할당량이 있던 나는 그날도 거실 소파에 앉아서 영어 단어책인지 문장 책인지를 뒤적거리며 외우고 있었다. 보통 나 혼자 있을 경우가 거의 없는데 그날은 나 혼자였던 것 같다. 현관 쪽 처마 같은 지붕 덕분에 뜨거운 불볕 대신 적당히 화사한 햇빛이 거실에 들어왔다. 고요한 거실에서 들리는 소리라곤 나의 책 넘기는 소리와 '옥옥'뿐이었다. "옥옥- 옥옥-" 내가 등을 진 벽 뒤쪽에서 두어 번 소리가 났다. 혹시나 옥옥이 내게로 올까 두려움은 이미 이 집에 온 후 며칠 만에 떠나보냈다. 옥옥 입장에서도 저보다 한창 큰 덩치의 사람들에게 쉽사리 다가가기란 결코 쉽지 않았을 터. 소리가 들리든 말든 한가로이 영어를 공부하고 있는데 점차 소리가 위쪽으로 옮겨갔다. "옥옥- 옥옥-" 그래. 너도 심심하겠지. 바닥만 아니라면 벽 어느 부근이던 상관없어.
툭. 몇 분이나 지났을까? 어느새 위에서 들리던 "옥옥-"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다만 무언가 둔탁한 소리, 아니 둔탁하다고 하기엔 아주 미약한 소리가 내 귀에 채 들리기도 전에 정수리로 느껴졌다. 그리고 순간 퍼진 따듯함.
옥옥이 내 머리에 큰 일을 본 것이다.
도마뱀도 당연히 배출을 하겠다만 그걸 본 사람이 내가 될 줄이야. 아니 느낄 사람이 내가 될 줄이야!
다행히 울진 않았다. 울 일도 아니니 뭐. 앞서 말한 것처럼 얼마간의 시간을 흘려보낸 뒤 내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손에 닿는 느낌은 물컹도 울컥도 아닌 울컹이었다. 물감을 팔레트에 한 방울 짜낸듯한 양으로 추정되고 색은 약간의 갈색. 확인사살이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 뒤로 몇 번을 맨 손으로 만지고 닦아냈다. 조잘조잘 떠들기 좋아했던 만 9세의 키미였지만 이 일은 말하지 않았다. 초등학생에게 응가, 똥이란 굉장히 수치스러운 것이자 최대의 놀림거리란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나 혼자만의 비밀로 묻어두었다. 비록 내가 직접 한 것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그 이후의 기억은 나지 않는다. 영어 공부를 다 끝마쳤던가? 아니면 그 뒤로 상심해서 나가 놀았던가. 희한하게 손으로 닦아내던 장면까지만 기억나고 그 이후엔 소리만 또렷하게 남았다. 어딘가 후련해 보이는 그 소리... "옥옥- 옥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