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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리얼솜 Oct 19. 2022

11살 킴과 9살 키미 사이

[만 9세 소녀의 나 홀로 유학 생활 - #4]

필리핀에 도착한 다음날 본격적으로 엄마 아빠 없이 모든 것을 나 혼자 해내야 하는 진짜 유학생활이 시작됐다. 아침에 일어나서 혼자 세수와 양치를 하고 서랍에서 내가 좋아하는 진분홍색 프릴이 달린 반팔티와 인터크루 5부 반바지를 척척 꺼내 입었다. 방문 옆 벽에 길고 좁게 붙어있던 거울을 보며 한국에서 가지고 온 하늘색 구슬 방울이 달린 머리끈을 엄마가 알려준 대로 두 번 빙빙 돌린 후 고정시켜 야무지게 머리도 묶었다. 


이렇게 나 홀로 유학 생활의 대망의 첫날이 시작됐다. 


어학원에는 나 말고도 같이 생활하는 중, 고등학교 언니들이 5명 정도 있었는데 나와 함께 온 언니 1명 빼고는 전부 학교에 간 시간이었다. 방 침대에 앉아 손가락만 꼼지락대고 있는데 원장 선생님이 거실로 나와 언니를 불렀다. 뭘까? 나도 학교에 가나? 기대 반 궁금함 반으로 거실에 나가보니 필리핀 사람들이 몇 명 있었다. '우와 신기하다. 외국인이잖아?' 그들은 나를 보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Hello! Nice to meet you!" 갑작스럽게 들리는 영어에 벽에 딱 붙어 아주 작게 '헬... 헬로' 하며 중얼거리고 있던 내게 원장 선생님은 웃으며 말씀하셨다. 편의상 나를 통통이라고 지칭하겠다. "오늘부터 여기 있는 튜터 선생님들이 통통이 영어 가르쳐주실 거야~" 당연히 나도 언니들처럼 교복을 입고 학교에 다닐 줄 알았는데 집에서만 공부를 한다니 이해를 잘 하진 못했지만 이곳에는 엄마도 아빠도 없었다. 직감적으로 원장 선생님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저 "네" 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대사관에서 일을 하셨던 이모 덕분에 어릴 때부터 각종 영어 테이프와 디즈니 만화를 통해 영어에 친숙했고, 유창하진 않더라도 내 소개는 무리 없이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도 직접 외국인과 말은 해본 것은 아마도 처음이었던지라 조금은 낯을 가렸다. 원장 선생님은 튜터 선생님들과 몇 마디 나누시더니 내게 물어보셨다. "통통이 영어 이름 있어?" "네. Kim이요!" 어쩌다 내가 Kim이란 이름을 썼는진 잘 모르겠다만 나는 김씨이기 때문에 아마 영어 학원에서 대충 성으로 이름을 지었던 것 같다. 원장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아. 키미?"라고 반문하셨다. 어디서나 똑 부러지게 자기소개를 했던 나는 다시 한번 말씀드렸다. "아니요. Kim! 이요" 야무지게 이름을 강조하며 말이다. 그런데 원장 선생님은 알아 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또 끄덕이시면 말씀하셨다. "그래. 그러니까 키미!" 왜 못 알아들으시지? 어리둥절한 나는 이번엔 조금 주눅 들어 말했다. "아니요. 키미가 아니라 킴!인데..." 원장 선생님이 들으시기에는 똑같은 발음이었는지 조금 답답하다는 눈치셨다. "그래그래. 키미 해 그냥~" 그러더니 튜터 선생님들에게 영어로 내 이름을 '키미'라고 소개하셨다. '나는 킴인데... 키미가 아니라...' 조금 억울했지만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날부터 나는 키미가 됐다. 


이후 튜터 선생님께서 내 영어 실력을 테스트할 겸 몇 가지 영어로 물어보셨다. "How many people are in your family?" "Four! Father, mother, brother and I." "Okay, great. How old are you?" 이 정도는 식은 죽 먹기였다. 이모랑 이미 한국에서부터 자기 소개하는 부분은 몇 번이고 마스터했다. "I'm eleven years old!" 그러자 선생님이 조금 놀라며 다시 반문했다. "Eleven years old?" 


원장 선생님은 잠시 우리의 대화를 중지시키더니 대신 답변 주셨다. "She's nine. Eleven in Korea, nine in here." 


숫자를 알아들은 나는 다시 말했다. "No, nine. I'm eleven years old." 나는 엄연히 11살 초등학교 4학년인데 왜 9살이라고 하지? 9살은 2학년인데 말이다. 그러자 원장 선생님은 내게 말씀하셨다. "통통아. 너 여기서는 9살이야. 생일 안 지났지 아직?" "네. 제 생일 10월이에요." 내가 필리핀에 5월 초에 갔으니 내 생일까지는 아직 한참 남았다. "그래. 그러니까 너 여기서는 9살이야."만 나이라는 개념을 전혀 몰랐으니 도대체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엄마나 아빠가 그랬다면 바로 따박 따박 말대꾸를 하며 나는 9살 2학년이 아니고 11살, 무려 4학년 언니라고 끝까지 얘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만 9세에게도 눈치는 있었다. 여기는 낯선 곳이고 내 의견을 끝까지 말했을 때 이러한 내 모습을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이해해주고 감싸줄 곳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냥 수긍했다. 아하. 여기서는 11살이 아니라 9살이고, 킴이 아니라 키미구나 하고 말이다. 


그렇게 11살 4학년 언니 킴에서 9살로 강등된 키미로서의 나 홀로 유학생활이 진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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